"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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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oma San Paolo fuori le mura BW 1.JPG|thumb|275px|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대성당'''({{llang|it|''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또는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대성당'''은 [[로마]]의 4대 [[바실리카|성전]] 가운데 하나이다. 나머지 대성전으로는대성당으로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전대성당]]이 있다.
 
== 역사 ==
{{출처 필요 문단}}
대성전은대성당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성 바오로]]가 순교하고 묻혔다고 전해지는 장소 위에 세워졌다. 성 바오로의 신봉자들은 성 바오로의 무덤 위에 ‘cella memoriae’라 불리는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최초의 건물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 때 확장되었다.
 
386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치세에 중랑(中廊)과 더불어 네 개의 측랑(側廊)과 익랑(翼廊)이 추가되면서 대성당을 좀 더 크고 아름다운 대성전이대성당이 지어졌다. 모자이크 작업 등은 [[교황 레오 1세|성 대 레오 1세 교황]]의 재위 때까지 끝마치지 못했다. 5세기까지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은대성당은 옛 [[성 베드로 대성전대성당]]보다 규모가 더 컸다. 그리스도교도 시인 [[프루덴티우스]]는 황제 [[호노리우스]]의 치세에 보았던 몇몇 기념물들의 화려함과 표현이 풍부한 선들에 대해 설명하였다.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은대성당은 5세기 [[오스티아]]의 순교자들이었던 [[성 타우리노]]와 [[성 헤르쿨라노]]에게도 봉헌되었으며, ‘삼위일체이신‘세 분 주님 대성전’이라는대성당’이라는 뜻의 ‘트리움 도미노룸 대성당(''basilica trium Dominorum'')’이라고 불렸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성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 치세에 대성전은대성당은 다시 광범위하게 수정되었다. 성 바오로의 무덤 위를 일직선으로 덮은 제대를 한층 높여 치장하였다. 무덤 위에 세워진 제대로 말미암아 성 바오로의 무덤에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 기간에 대성당 근처에 성 아리스토 수도원과 성 스테파노 수녀원 등 수도원 두 곳이 생겼다. [[교황 심플리치오|교황 성 심플리치오]]는 로마의 명의본당에 사제들을 임명하여 대성당들에서 일주일간씩 교대로 근무하도록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의 사제와 수도원들이 이를 거부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교황 성 그레고리오 2세]]는 이러한 대성전대성당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예전에 대성당을 관리하던 수사들을 복직시켰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밖에 있는 대성전은대성당은 9세기 [[사라센]]의 침략으로 손상되었다. 이에 [[교황 요한 8세]]는 대성당과 수도원, 소작농들의 거주지에 요새를 쌓아 요아니스폴리스(이탈리아어로는 조반니폴리)라는 이름의 마을을 구성하였다. 이 요새는 1384년 지진으로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 존재하였다.
 
937년, [[클뤼니의 오도|클뤼니의 성 오도]]가 로마에 오자 로마의 귀족인 [[스폴레토의 아벨릭 2세]]는 그의 신도들에게 수도원과 대성당을 맡겼으며 성 오도는 [[몬테카시노]]의 발두이노를 대신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의 치세에 수도원의 [[아빠스|수도원장]]과 [[아말피의 판탈리오네]]가 대성당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출신 예술가들이 제작한 청동 문들을 바쳤다. 대성전은대성당은 [[교황 마르티노 5세]]에 의해 [[베네딕토회 연합체|몬테카시노 연합체]]의 수도자들이 맡았다가 대수도원의 자치 수도원장이 맡았다. 그 후 수도원장의 사목권은 [[치비텔라산파올로]], [[레프리냐노]], [[나차노]] 교구의 모든 성당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산파올로 교구는 [[교황대리 추기경]]의 사목권 아래 있었다.
 
[[파일:Rom, Sankt Paul vor den Mauern (San Paolo fuori le mura), Kreuzgang des Klosters.jpg|thumb|left|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수도원의 회랑.]]
수도원의 아치 있는 [[회랑]]은 1220년에서 1241년 사이에 세워졌다.
 
1215년부터 1964년까지 대성전은대성당은 [[알렉산드리아 라틴 총대주교|알렉산드리아의 라틴 총대주교좌]] 성당이었다.
[[파일:Rom,Roma Sankt- PaulBasilia vordi den Mauern (San Paolo fuori le mura), Heilige Pforte11.jpgJPG|thumb|200px|성년의 문.]]
[[파일:Roma-sanpaoloforilemura01.jpg|thumb|대성당 내부.|200px]]
[[파일:Q10 s Paolo ciborio di Arnolfo 1000788.JPG|thumb|200px|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만든 감실.]]
1823년 7월 15일, 지붕용 납판자를 수리하던 일꾼의 과실로 화재가 일어났다. 결국, 대성전의대성당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전까지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은대성당은 로마에 있는 모든 성당 가운데 유일하게 르네상스 이전의 화가의 작품을 무려 1435년 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곧 전 세계가 대성전을대성당을 복구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이집트]]의 총독은 [[설화 석고]]로 만든 기둥들을 보냈으며,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황제는 희귀한 [[공작석]]과 [[청금석]]을 감실의 재료로 보냈다. [[테베레 강]] 편에서는 주요 외관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복원이 완료되었다.
 
대성전은대성당은 1840년에 재건되었다재개장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5년이 지나고 [[교황 비오 11세]]와 쉰 명의 추기경들이 대성전에대성당에 입당하고서야 제 기능을 하였다. [[1891년]] [[4월 23일]], [[포르타 포르테세]]에서 폭발이 일어나 스테인드글라스들이 파괴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칼데리니의 디자인으로 정면에 보강공사가 진행되었으며 조각가 오비치의 성 바오로 석상이 세워졌다.
 
2005년 5월 3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수석사제]]가 대성전을대성당을 담당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같은 날 이탈리아의 [[안드레아 코르데로 란자 디 몬테제몰로]] 수석사제가 대성전의대성당의 첫 수석사제로 임명되었다.
 
[[파일:Apse mosaic of the Basilica of Saint Paul Outside the Walls.jpg|thumb|left|250px|후진 모자이크(1220). 후진 모자이크는 베네치아 예술가들이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측면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 안드레아, 성 루카가 있다.]]
20세기에 만든 입구에는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장면들을 1070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키오스의 스타우라키우스가 제작한 원래 입구에 장식되었던 박(箔)의 잔여물이 포함되어 있다. 오른쪽에 있는 문은 ‘성년의 문’으로 불리며, [[성년]] 기간에만 열린다.
 
대성전은대성당은 중랑(中廊) 하나에 측랑(側廊) 네 개를 가졌던 원래의 건물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대성당은 길이 131.66m에 넓이 65m, 높이 29.70m로 로마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교회 건물이다.
 
대성전대성당 안에는 천장에 치장용 벽토가 발라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에 만든 80개의 기둥이 있다. 옛날의 대성전에서대성당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개선문]]과 후진(後陣)의 내부 일부뿐이다. 후진에는 [[피에트로 카발리니]]가 그린 모자이크들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1823년에 대부분 소실되었다. 재건할 때 도입한 예전의 자취는 얼마 되지 않았다.
 
개선문에 있는 5세기 모자이크들은 원형 그대로이다. 하단부의 비문에는 성 대 레오 1세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과 [[갈라 플라키디아]]가 대금을 지급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제는 [[요한 묵시록]]에서 묘사한 그리스도의 흉상을 둘러싼 교회 원로 스물네 명과 그 위에 네 명의 복음사가들을 상징하는 짐승들이 하늘을 나는 모습이다. 아치의 오른쪽에는 성 베드로, 왼쪽에는 성 바오로가 새겨져 있으며, 특히 성 바오로상은 사도의 무덤이 있는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다.
사도의 무덤 위에 세운 제대 안 [[감실]]은 13세기에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제작한 것이다.
 
대성전에는대성당에는 네 개의 측랑과 중랑들을 격리하는 기둥들 위까지 이르는 소벽(小壁)에 역대 교황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의 대성당에 걸린 교황들의 초상화들은 19세기부터 그린 것들이다. 또한, 대성당 안의 벽들에는 성 바오로의 일생을 담은 장면들을 두 시리즈의 모자이크로 다시 장식하였다.
 
[[제의실제의방]]에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크고 훌륭한 동상이 있다.
 
익랑(翼廊)의 남쪽에는 1205-1241년 [[바살레토]]가 지은 회랑이 있는데, 서로 다른 형태의 쌍둥이 기둥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중세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것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어떤 기둥들에는 금과 유색 유리 모자이크를 박아 넣었다. 아키트레이브와 회랑의 내부 창틀에도 이와 같은 형태의 장식을 볼 수 있다. 또한, 파괴된 대성당의 파편들과 고대 석관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아폴로 신화의 장면들이다.
 
[[파일:Front of the Basilica of Saint Paul Outside the Walls - Roma - Italy.jpg|thumb|대성당 앞에 있는 성 바오로 석상|150px|right]]
대성전대성당 부속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있는 재건축 관련 기록을 보면, 공사 도중에 큰 대리석 석관 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적어도 서기 39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 석관 위에는 두 개의 석판이 올려져 있었는데, “Paulo Apostolo Mart(yri)” (사도이자 순교자인 바오로) 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발견한 다른 석관들과는 달리 이 석관은 발굴 기록에 적히지 않았다.
 
[[2006년]] [[12월 6일]], 바티칸의 고고학자들은 제대 아래에서 사도 바오로의 유해가 담긴 것으로 보이는 석관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다. 고고학자들은 [[2006년]] [[12월 11일]]에 기자 회견을 열어 2002년부터 [[2006년]] [[9월 22일]]까지 진행된 발굴 작업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2000년 성년 동안에는 사도의 무덤에 접근해서도 만져서도 안 된다는 대성당 측의 입장에 실망감을 표하였다. 사람의 유골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석관을 열어 내부를 조사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현재 무덤 위에는 작은 유리창을 설치, 일반인들이 석관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해 놓았으며 석관은 한쪽 끝 부분만 공개하고 나머지는 묻혀 있는 상태다.<ref>{{뉴스 인용|제목=순교자 성 바오로비문 무덤 발견|url=http://www.catholictimes.org/news/news_view.cath?seq=34979&|출판사=가톨릭신문|저자=|작성일자=2006-12-24|확인일자=2009-03-05}}</ref>
== 같이 보기 ==
{{Commons|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 [[성 베드로 대성전대성당]]
*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대성당]]
*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대성당]]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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