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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적 ==
건안 연간, 형주자사 부군(傅群)의 주부가 되었는데, 부군을 등지고 양양태수 [[관우]]에게 갔다. 관우에 의해 공조가 되었고, [[유비]]에게 인사하였다. 유비가 초빙하여 좌장군병조연으로 삼았고, 유비가 한중왕이 되었을 때 상서가 되었다. 유비가 오를 정벌할 때, 상서령 [[유파]]와 화합하지 못하여 촉한이 지배하지도 못하는 위나라 영지의 먼 땅인 홍농 태수로 좌천되었다. 즉, '''태수 아닌 태수'''라는 빈 껍데기 직함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제갈량과 사이가 좋았기에, 유비 사후, 제갈량이 다시 불러들였다. 건흥 3년(225년), 승상 [[제갈량]]이 참군으로 삼았다. 건흥 5년(227년), 제갈량을 따라 한중으로 갔으며, 건흥 8년(230년), 승진하여 장사가 되었고, 수군장군을 더했다. 제갈량이 여러 차례 출병할 때, 계획을 짜서 부대를 편성하고, 양곡을 계산했으며, 군용 물자를 조달해서조달했다. 제갈량은그러나 [[위연]]과 재능을사이가 아끼긴 했지만 유파나빴는데, 위연등과의 반목을 알고있었던 탓에 제갈량은 양의의위연과 '''재능만양의 존중'''해주었을양쪽의 재간을 인격적으로는아꼈기에 존중하지차마 않았다.어느 사소한한쪽을 것으로 트집잡기를 좋아하는 양의를 다른 촉한의 신료들은 피했지만, [[위연]]만 홀로 굽히지 않아 위연과는 물과 불 같이 사이가내치지 나빴다못했다.
 
제갈량 사후, [[강유]], [[비의]]와 함께 군사를 물렸다. 이때 사마선왕 곧 [[사마의]]가 추격하였는데<ref>《삼국지》〈제갈량전〉</ref>, 강유가 양의로 하여금 기를 되돌리고 북을 쳐 사마의 쪽으로 향하려 하여, 사마의가 더 쫓지 못하고 물러섰다고 한다. 위연은 양의의 지휘를 받기를 거부하고 잔도를 끊어 양의 등이 퇴각하는 것을 방해하여, 마침내 위연과 양의는 서로 표를 올려 상대방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주장하고 싸웠다. 위연의 병사들이 위연에게 잘못이 있다 하였으므로 위연의 군대는 무너지고, 위연은 사로잡혀 목이 잘렸다. 위연이 사망하자 양의는잘렸으며 위연의 일족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위연과 같은 죄를 씌워 죽이고 매우삼족도 재미있어했다주멸되었다.
 
위연을 주살한 후, 양의는 성도로 돌아와 중군사가 되었으나 일이 없으므로 한가하게 지냈다. 양의는 퇴각에 성공했고 위연을 주살하였으므로 자신의 공이 크다고 여겨 마땅히 제갈량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여겼으나, 제갈량은 양의의 성격이 좁으므로 [[장완]]을 후계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때 장완은 아직 대장군에 임명되지는 않았고(양의가 쫓겨난 후에야 임명), 다만 상서령·익주자사가 되었는데, 양의는 자기 혼자서만 장완보다 나이나 경력이나 재능이나 모두 월등하다고 여겼으므로 원망하여 탄식하는 소리를 일삼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양의의 말에절제가말에 절제가 없음을 두려워했고 감히 양의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다만 비의가 양의를 위로하였는데, 양의는 비의에게 원망을 토로하며토로하였고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고 말았다말했다.
 
{{인용문2|'''예전 승상이 죽었을 적에 내가 만약 군을 들어 위씨에게 갔다면 지금 내 처지가 이토록 영락했겠소!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인용문2|'''위나라로 귀순했더라면 이런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기회가 되면 언제라도 위나라로 가겠다.'''}}
 
비의는 은밀히 이 말을 상주했다. 양의의 이 말 한마디가 온 촉한을 뒤집어놓았다. 건흥 13년(235년) 정월, 양의는 파직되어 서민이 되었고, 한가군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양의는 비방하는 말을 하여, 마침내 군에 하명하여 양의를 사로잡으라고사로잡도록 하기에 이르렀고,했다. 양의는 강유에 의해 사로잡힌 뒤 함거에 실려서 성도로 압송당하는 도중 자결했다.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