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항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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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서울대 문리대에서의 단식농성은 다른 학생들을 자극하였다. 서울 시내의 각 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6월 2일]] [[고려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상대생 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데모를 주도하자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곳곳에서 시위 항쟁이 벌어졌다.<ref name="외로운 290"/> [[6월]]초 공화당 [[김종필]] 의장이 [[한일회담|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6월 3일 정오를 기해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벌였다. [[6월 3일]] 정오, 일제히 거리로 쏙아져쏟아져 나온 서울 시내 1만 2000명의 학생들은 도처에서 경찰과 충돌, 유혈극을 벌이면서 도심으로 진출하였다. [[윤보선]]은 이를 마치 4·19 학생의거 당시를 연상케 했다<ref name="외로운 290"/>고 묘사하였다. 대학생 7~8000명이 중앙청 앞으로 몰려들면서 세종로 일대는 무질서<ref name="외로운 290"/>와 혼란에 빠졌다. 중앙청 앞의 바리케이트는 이미 무너졌고 경찰은 청와대로 올라가는 통의동 앞에 저지선을 만들어놓았다.<ref name="외로운 291">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991) 291페이지</ref>
 
몇몇 대학생들은 대학에서 박정희, 김종필, 민생고(民生苦) 화형식과 일본 수상 이케다(池田)의 화형식, 그리고 오일육(吳一陸) 피고에 대한 모의 재판을 열고 박정권을 성토하였다.<ref name="외로운 291"/>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은 6월 3일 오후 4시 경에 교문을 나섰다. 일부 학생들은 도보 이동 중 지쳤고, 지친 학생들은 들 것에 태우고 시위에 돌입했는데 맨 앞의 들 것에는 송철원이 누워 있었다. 이들은 데모 학생들과 연도(沿道)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중앙청 앞에 도착, 데모대의 맨 앞에 섰다가 경찰의 최루탄 공세에 밀려 학교로 철수하고 말았다.<ref name="외로운 291"/> 이 시위는 6.3 항쟁을 일으킨 시위의 시발점<ref name="외로운 291"/>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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