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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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이 주장한 금국정벌론이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다.{{출처}} 식민 치하에 있던 신채호가 묘청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금국 정벌이라는 주장 때문이며, 조선의 독립 의지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민족 자주적인 입장에 선 사례를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신채호의 기대와 달리 묘청 세력의 금국 정벌 주장은 실현은 거의 힘들었으며, 기병강국이던 금나라를 보병 위주의 고려군이 공격하여 성과를 내기는 힘들다고 주장했다. 방어자 입장에서는 전통력으로 산성 중심으로 적 기병대의 충격력과 기동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방어가 가능했으나, [[만주]]로 공격을 하게 된다면 우수한 기병대가 절대 부족했던 고려가 만주 일대의 평원에서 치러지는 전투에서는 절대 불리할 것이란 주장이다. {{출처}}
 
물론 인종 전대인 [[고려 예종|예종]] 때 [[윤관 (고려)|윤관]]이 기병으로 여진 정벌을 단행해 [[동북 9성]]을 축성하는 성과를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고려의 국력을 다 쏟아부어 동북 9성을 쌓았지만 얼마 뒤에는 고스란히 되돌려줘야 했다. [[윤관의 여진 정벌]]은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해 겨우 이긴 싸움이었고, 예종의 선대인 [[고려 숙종|숙종]]부터 기병 양성에 노력한 끝에 겨우 가능했다. 그러나 요를 멸망시키고, [[북송]]을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금은 이미 고려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이런 금을 정벌한다는 정책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했다는 것이다.{{[[출처 : 다시쓰는 간신 열전}}]]
 
=== 묘청에 대한 비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