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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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날짜=1950년 6월 26일
|장소=[[경기도]] [[동두천양주군]] [[동두천시|이담면]]
|결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국1={{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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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권무]](李權武)가 이끄는 북한군 제4사단은 [[연천군포천군]] [[청산면 (연천군)|청산면]] [[초성리]](哨城里),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兩遠里), 파주시 [[적성면 (파주시)|적성면]] [[적암리]](積岩里) 일대에 맹렬한 공격준비사격을 집중한 후 [[전곡]]-[[동두천]] 간 [[국도 제3호선]] [[평화로 (국도 제3호선)|평화로]] 구간에 보, 전(步戰) 협동부대로 편성된 부공을 투입하고 그 서쪽의 [[적암리]]-[[양주시]] [[은현면]] [[봉암리]](鳳岩里) 접근로(지방도 제375호선)에 조공을 투입하여 병진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은조선인민군은 [[38도]] 분계선 일대의 국군 진지가 거의 무개호이며 배치된 병력도 1개 초소 당 분대나 소대규모인 것을 지상관측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 내의 가용한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30여 분간이나 [[국도 제3호선]]과 그 주변을 맹타하였는데 포격으로 인한 도로파괴가 그들 공격부대의 기동에 제한이 된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포격이었다.
 
이는 당시 북한군의 정보수집능력이 매우 낮은 수준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전투행동이었으며, 표적의 성질과 기동로의 상태 및 적정을 감안하지 않고 계획된 공격준비사격을 기계적으로 실시한 사실은 [[소련]] 군사고문단에 의해 공격명령이 작성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