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적 애국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6번째 줄:
 
=== 각국의 사례 ===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은 [[2차 세계대전]] 때 해방 운동에 초점을 맞추면맞추는 인물이었다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대중계층의 지지를 받기 쉬웠고,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 형성 이후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실행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북한]]의 [[김일성]]<ref>Joel H. Spring. ''Pedagogies of globalization: the rise of the educational security state''. Mahwah, New Jersey, USA: Lawrence Erlbaum Associates, Inc., 2006. Pp. 186.</ref>도 그 축에 속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모택동]]<ref>Ghai, Yash (2000). Autonomy and Ethnicity: Negotiating Competing Claims in Multi-Ethnic Stat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77.</ref>,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ref>Teresa Rakowska-Harmstone. Communism in Eastern Europe. Indiana University Press, 1984. Manchester, England, UK: Manchester University Press ND, 1984. Pp. 267.</ref>, [[베트남]]의 [[호치민]]<ref>William Warbey. ''Ho Chi Minh and the struggle for an independent Vietnam''. Merlin Press, 1972.</ref>도 그에 속한다. 때문에 2차 대전에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한 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에겐 이러한 사회주의적 애국주의가 일종의 정치적 시너지 효과로 작용했다.
 
[[북한]]에서의 형태는 [[주체사상]]의 파생으로도 등장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티베트]]를 침공하면서 [[사회제국주의]]의 형태로도 작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