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67번째 줄:
 
== 평가와 기타 ==
훗날 [[조선]] 정치와 경제등 모든 것의 발목을 잡는 [[붕당정치]]를 묵인한 최초의 왕으로 비판을 받는다. 서자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정통성이 취약한 왕이라는 것 때문에 왕권에 맞서려는 자들과 [[신권]]을 누르지 못하여 생긴 일이지만 이를 역이용하여 [[왕권]]을 강화를 하려 하였다. [[선조]] 대에 와서 [[훈구]]세력을 몰아냈지만 자기 잘못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기 일쑤였는데, 대표적 예가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건들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막을 수 있던 기회는 여럿이 있었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전쟁이 발발하면 중간 상륙지인 자신의 땅인 대마도에 10만 군대를 주둔하면 본인 영토의 경제에 불이익이 될 거라는 것을 인식하여 [[조총]]을 조공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 본토의 상황을 돌려서 말을 하여 위험성을 전달했으나 선조는 오로지 왕권 강화에만 집중했다. 전에는 [[율곡 이이]]가 조선의 각 관아와 성을 둘러본 결과 짓다만 성이 있고 함선은 쓰지 않다보니 더 이상 운영을 못할 지경에 무기는 다 녹이 슬어있고 병졸들이 근무와 훈련조차 태만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껴 [[10만 양병설10만양병설]]을 제안했으나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건 계획하지 않아서 신하들의 반발도 거셌으나 선조도 재정을 낭비할 수 없다며 무시를 하였다. 후일 일본본토의 상황을 보기위해 통신사를 보내고 통신사가 돌아온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이야기와 전쟁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변변치 않은 왜국, 오랑캐라 여기고 있던 선조는 결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한 동인 측 인물인 [[김성일]]의 보고를 믿고 다시 축성중인 성을 멈추게 하였는데 이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의 일이니 2년 동안이라도 다시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린 셈이다. 그리고 선조는 서자 출신 이였기에 왕권에 대한 집착이 강함을 엿볼 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예로 [[이순신]]에 대한 견제이다. [[임진왜란]]말기 도성을 버려 선조는 이미 민심이 멀어진 무렵 [[이순신]]의 거듭된 승전보와 승전이 날 때마다 백성들은 [[이순신]]을 칭송하였으나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던 [[선조]]도 점차 민심이 이순신에게 쏠리고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잘 훈련된 정예병인 조선 해군과 그 모든 조선 해군을 움직일 수 있는 [[이순신]]이 딴 맘을 먹으면 자신의 권좌를 빼앗을까봐 두려워하여 [[정유재란]]발발 전에 명령불복종과 반역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파직 <ref>당시에는 조정에서 어명이 당도해야 출정이 가능했고 이를 어기면 벌을 받기는 하나 역사적으로 보면 현장의 의견을 많이 반영하여 정상 참작하였으나 이순신장군에게만 명령불복종이란 이유로 도성까지 끌려오는 경우는 없었다.</ref>과 동시에 그 죄로 도성으로 끌고 와 형벌을 가하고 그동안의 공적으로 백의종군을 시켰을 정도였다. 당시 선조는 2번의 전쟁을 극복한 왕이라 역사에 적혀있지만 훗날에 대한 평가는 국가의 큰 재앙을 스스로 자초하게 만든 무능한 왕 상위권에 기록이 된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