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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세력{{출처}} → [[유표 (후한)|유표]] → [[유종 (후한)|유종]] → [[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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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재주가 뛰어났으며, 일찍이 동향인 [[괴월]](蒯越)과 함께 군사로써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 (후한)|유표]](劉表)를 섬겼다.<ref>《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ref> 또한 [[조조]](曹操)와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ref>《양양기구기》의 기록을 보면 조조는 채모를 그의 자인 '''"덕규"'''라고 불렀으며, 그를 만나러 그의 침소에 들어가 자제들까지 만났다. 이로 말미암아 채모와 조조는 상당히 절친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ref>
 
채모의 고모는 후한의 태위 [[장온 (후한)|장온]](張溫)에게, 큰누나는 [[황승언]](黃承彦)에게, 작은누나는 유표의 후처로 각각 시집을 갔다. 또한 채모의 조카딸은 유표의 아들 [[유종 (후한)|유종]](劉琮)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세력이 더욱 커졌으며, 유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 실제로 유표가 형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채모의 공적이라고 한다. 유표는 바지사장 상태였고 형주는 사실상 채모가 실세였으며 형주의 진정한 주인은 명목상의 주인인 유표가 아니라 채모였다.
[[왕예]]가 [[조인 (후한)|조인]]에게 속은 [[손견]]에게 살해당하자 조정에서는 그 후임으로 유표를 임명하고 임지로 보냈는데 이 때 채모는 홀홀단신으로 형주에 도착한 [[유표 (후한)|유표]]와 인척관계를 맺었으며 인근의 괴씨와도 연합하였다.{{출처}}
 
채모의 고모는 후한의 태위 [[장온 (후한)|장온]](張溫)에게, 큰누나는 [[황승언]](黃承彦)에게, 작은누나는 유표의 후처로 각각 시집을 갔다. 또한 채모의 조카딸은 유표의 아들 [[유종 (후한)|유종]](劉琮)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세력이 더욱 커졌으며, 유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 실제로 유표가 형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채모의 공적이라고 한다. 유표는 바지사장 상태였고 형주는 사실상 채모가 실세였으며 형주의 진정한 주인은 명목상의 주인인 유표가 아니라 채모였다.
 
《촉서(蜀書)》 선주전(先主傳)에 인용된 《위진세어(魏晉世語)》에 따르면, 괴월과 함께 유비의 목숨을 노렸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