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키아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전거 정보 틀 추가; 예쁘게 바꿈
16번째 줄:
그 뒤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가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자 황제의 누나인 [[풀케리아]]와 결혼하고 동로마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풀케리아는 이미 독신 서약을 한 몸이었으므로 마르키아누스는 단지 형식적인 남편에 불과하였다.
 
마르키아누스가 황제가 된 이후 처음으로 한 일은 전임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훈족]]의 [[아틸라]]에게 바치기로 한 연례공물을 폐지한 일이었다. 당시 훈족은 [[서로마 제국]]의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물을 폐지한 동로마 제국에게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못했다. 이 시도는 성공적이어서 그의 치세 동안 동로마 제국은 국고를 튼튼히 할 수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정책으로 일관하여 서로마가 아틸라의 침공을 받을 때에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마르키아누스는 아틸라가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로부터 며칠 후에 아틸라가 죽었다고 한다.
 
마르키아누스는 당시 동로마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이단]] 논쟁에 휩싸였다. 그리스도 [[단성론]]을 둘러싸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논란으로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마르키아누스는 [[451년]] 10월 [[칼케돈 공의회]]를 열고 논란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비록 단성론을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시리아]]나 [[이집트]]의 [[주교]]들은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단일한 본성을 계속 주장하여 향후 비잔티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