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코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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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두 나라의
볼리비아는 [[파라과이]]보다 훨씬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파라과이보다 인구가 3배나 많았고, [[독일]]의 장군 [[한스 폰 쿤트]]에 의해 잘 훈련된 군대를 갖고 있었으며, [[미국]] 은행의 차관으로 구입한 충분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디언 징병으로 구성된 볼리비아군의 사기는 낮았으며, 반면 파라과이군들은 저지대 [[늪지]]와 [[정글]]에서 더 잘 싸울 수 있었다. 저지대 늪지와 정글에서 많은 볼리비아군들은 총격전으로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질병과 독사에 물려죽었다. 두 나라는 이 분쟁지역에 군사기지를 세웠다. [[1928년]] [[12월 5일]], 파라과이는 아메리카 각국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면전으로 치달은 일련의 제한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양측 군대는 좀더 많은 병력을 차코에 배치했으며 [[1932년]]이 되자 전쟁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6월]], 볼리비아는 그란차코 북부 지역에 있는 파라과이 기지를 점령했고 [[포르틴 보케론]](보케론 성채)
[[1935년]] [[6월 12일]], 볼리비아군의 반격으로 파라과이군이 수세에 몰리게 된 뒤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 전쟁에서 약 10만 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두 나라는 많은 희생을 치렀다. 평화조약은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페루]]·[[우루과이]]·미국이 참가한 [[차코 평화회의]]에서 마련되어 [[1938년]] [[7월 21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인되었다. 파라과이는 분쟁지역 대부분에 대한 소유권을 얻었고,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회랑지대와 [[푸에르토카사도]] 항구를 얻었다. 이 전쟁은 볼리비아 경제를 붕괴시켰고 곤궁한 볼리비아 일반 대중 사이에 개혁요구를 불러일으켰다. 한편 평화조약의 체결은 주로 아르헨티나의 공으로 돌려졌으며 아르헨티나의 투자가들은 파라과이가 영토를 획득함에 따라 큰 이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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