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코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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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두 나라의 적대행위는적대 행위는 이미 [[1928년]] [[필코마요 강]] 북쪽과, [[그란차코]]의 일부를 이루는 [[파라과이 강]] 서쪽에 위치한 광활한 황야 지역인 [[차코보레알]](면적 25만 9,000㎢)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충돌은 [[칠레]]가 [[볼리비아]]를 격퇴하고 볼리비아의 모든 해안지방을 합병한 [[태평양 전쟁 (남아메리카)|태평양 전쟁]](1879~84)의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 볼리비아는 해안이 봉쇄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라플라타 강]]를 통해 [[대서양]] 연안에 이르는 진로를 개척하려 했다. 이 진로를 가로질러 그란차코가 놓여 있었고 볼리비아인들은 그란차코에 막대한 [[석유]]자원이 있다고 생각했다.
 
볼리비아는 [[파라과이]]보다 훨씬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파라과이보다 인구가 3배나 많았고, [[독일]]의 장군 [[한스 폰 쿤트]]에 의해 잘 훈련된 군대를 갖고 있었으며, [[미국]] 은행의 차관으로 구입한 충분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디언 징병으로 구성된 볼리비아군의 사기는 낮았으며, 반면 파라과이군들은 저지대 [[늪지]]와 [[정글]]에서 더 잘 싸울 수 있었다. 저지대 늪지와 정글에서 많은 볼리비아군들은 총격전으로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질병과 독사에 물려죽었다. 두 나라는 이 분쟁지역에 군사기지를 세웠다. [[1928년]] [[12월 5일]], 파라과이는 아메리카 각국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면전으로 치달은 일련의 제한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양측 군대는 좀더 많은 병력을 차코에 배치했으며 [[1932년]]이 되자 전쟁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6월]], 볼리비아는 그란차코 북부 지역에 있는 파라과이 기지를 점령했고 [[포르틴 보케론]](보케론 성채)]]에 대항해 차코 중부지역에서 성공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8월]], 파라과이는 동원령을 발포하고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이 이끄는 부대를 보내 포르틴 보케론에 대한 최초의 주요공격을 감행했다. 포르틴 보케론은 [[9월]]말에 함락되었다. 볼리비아는 쿤트 장군을 소환하고 [[포르틴 나나와]](나나와 성채)를 공격하기 위해 남부지방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몇 개월 간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파라과이는 [[1933년]] [[5월 10일]]에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10월]]말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은 확대된 전선을 따라 일련의 공격을 감행했고, 볼리비아의 [[다니엘 살라망카]] [[대통령]]이 쿤트를 [[엔리케 페냐란다]] 장군으로 교체할 정도로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은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34년]] [[1월 9일]], 3주 동안의 일시적 휴전이 끝난 뒤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은 볼리비아의 [[발리비안 기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3~7월 발리비안에서는 차코 전쟁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발리비안 기지는 [[11월 17일]] 함락되었고 살라망카 대통령은 사임해야 했다. 파라과이군은 [[1935년]] 1월 볼리비아의 영내까지 계속 쳐들어갔다.
 
[[1935년]] [[6월 12일]], 볼리비아군의 반격으로 파라과이군이 수세에 몰리게 된 뒤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 전쟁에서 약 10만 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두 나라는 많은 희생을 치렀다. 평화조약은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페루]]·[[우루과이]]·미국이 참가한 [[차코 평화회의]]에서 마련되어 [[1938년]] [[7월 21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인되었다. 파라과이는 분쟁지역 대부분에 대한 소유권을 얻었고,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회랑지대와 [[푸에르토카사도]] 항구를 얻었다. 이 전쟁은 볼리비아 경제를 붕괴시켰고 곤궁한 볼리비아 일반 대중 사이에 개혁요구를 불러일으켰다. 한편 평화조약의 체결은 주로 아르헨티나의 공으로 돌려졌으며 아르헨티나의 투자가들은 파라과이가 영토를 획득함에 따라 큰 이득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