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가입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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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4-05-06}}
'''폐가입진'''(廢假立眞, '''폐가립진''')은 [[고려]](高麗) 시대 말기인 [[1389년]] [[11월]] 당시 [[고려]](高麗)의 [[문하시중|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었던 [[조선 태조|이성계]](李成桂)가 [[고려 우왕|우왕]](禑王)의 아들 [[고려 창왕|창왕]](昌王)을 보위에서 내쫓아 몰아 내고 [[고려]] [[왕족|왕족 종실]] 출신의 [[고려 공양왕|공양왕]](恭讓王)을 진짜 [[개성 왕씨|왕씨]](王氏, [[개성 왕씨]]) 군주랍시고 허수아비 군주로 추대하여 옹립하고 나서 1개월 후 [[1389년]] [[12월 31일]] [[고려 우왕|우왕]](禑王)과 그의 아들 [[고려 창왕|창왕]](昌王) 두 폐주를 모두 [[고려 공민왕|공민왕]](恭愍王) 치세 말기인 [[1371년]]에 [[사형]] 집행된 [[고려]]의 [[불교]] [[승려]] 겸 [[정치가]] [[신돈]](辛旽, <small>본관은 [[영산 신씨|영산]](靈山)</small>)의 핏줄이자 가짜 왕씨 군주랍시고 사형에 처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고려 우왕|우왕]](禑王)과 [[고려 창왕|창왕]](昌王) 부자가 [[고려 공민왕|공민왕]](恭愍王)의 아들과 손자인 [[개성 왕씨|왕씨]](王氏)가 아닌 [[신돈]](辛旽)의 아들과 손자인 [[영산 신씨|신씨]](辛氏)라는 비왕설(非王說)은 단지 [[조선 태조|이성계]](李成桂) 일파가 정치적 명분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날조된 모략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 바깥 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