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피에르 죄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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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적인 잔인함 ㅚ네의죄네의 영화에서 사람이 죽는 장면을 직접 보여주는 장면이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인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델리카트슨 사람들>에서 푸줏간 주인이 부메랑이 머리 박혀 죽을 때나 <인게이지먼트>에서 라브루예 장교가 죽을 때도 잔인하게 보이지 않는다. <믹막:티르라리고 사람들>에서 폭탄이 터질 때 역시 무섭거나 잔인하지 않고 오히려 재밌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우리가 어렸을 때 보았던 동화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표현법이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마녀가 아궁이에 빠져 죽는, 유리구두가 맞지 않아 발가락과 뒤꿈치 자르는 신데렐라 이야기 등 사실 서양동화에서 대부분이 이런 양상을 띠고 있다. 독일의 그림 작가 빌헬름 부쉬의 동화 <막스와 모리츠>라는 그림동화를 장난꾸러기 막스와 모리츠가 마을 사람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 탈곡기에 들어가 결국 거위의 모이가 된다는 내용이다. 마을 사람들은 막스와 모리츠가 죽은 것에 대해 아무런 위로나 죄책감 따윈 없다. 권선징악의 극단적인 예를 보여 충격 효과를 주고 있다. 사실 죄네의 영화 속에서의 잔인함이 이런 동화 속 장면들과 얼추 닮아있다. (하지만 때로는 죄네 영화에서의 비극은 주인공의 비극적 설정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것 또한 죄네만의 권선징악 안에서 ‘악’이 얼마나 ‘악’한가 표현하기 위해 쓰이고 있다.) 여타 다른 영화들의 잔인성은 죄네의 영화에 잔인성과 차별화 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죄네의 이런 동화적 상상력에서 나타나자는 것이다. ‘악’에게는 잔인한 형벌을 주게 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는다. 그저 그 행위 자체로 끝나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에 대해 슬픈 감정을 갖거나 분노를 하거나 복수에 대한 기쁨, 통쾌함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기 마련인데, 죄네의 영화에서는 그런 점이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델리카트슨 사람들>에서 여주인공 줄리는 그의 아버지 푸줏간 주인이 죽을 때도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그러한 장면 뒤에 바로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서 그것에 대해 어찌 느끼기 전에 넘어가곤 한다. <아멜리에>에서 아멜리에의 어머니가 옥상에서 자살하는 사람과 부딪혀 죽는 장면 바로 다음 암전이 되면서 내레이션으로 ‘아망딘 쁠랑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라고 말한 뒤 어린 아멜리에가 그네에서 곰돌이 인형과 놀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억지스러울 수도 있는 판타지: 죄네가 판타지에 능하다는 건 그의 영화를 본 사람 모두 알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일상 속에 드러나는 생활형 판타지다. 그 첫 번째가 자연스럽게 우연적인 일을 만들고 그 우연적인 일에서 사건의 해결방법이 나타난다. <아멜리에>를 보면 아멜리에가 영국 다이애나비 죽음과 관련한 뉴스를 보다가 화장품 뚜껑을 떨어뜨려서 그 뚜껑을 줍는데 화장품 뚜껑이 부딪친 벽 틈이 갈라지면서 누군가가 어린 시절 숨겨놓은 보물 상자를 발견한다. 또한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에서 보면 주인공 ‘원’이 악당들의 약물에 취해 ‘미에뜨’를 죽이려고 하는 장면에서 ‘미에뜨’의 눈물방울이 거미줄로 날아가서 거미줄을 흔들고 흔들린 거미줄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새가 깨어나고 등등 우연을 계기로 인과관계를 만들어 결국 배의 기적 소리 때문에 위기에서 탈출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우연한 연속이 주인공이 위기를 대처하거나, 주 내용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억지스러운 장면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그의 영화들을 점점 이해되는 게 죄네 영화의 특징이다. 이런 억지일 수도 있는 판타지는 <믹막; 티르라리고 사람들>에서 볼 수 있다. 라이벌인 두 군수업체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옆에 있다는 설정을 예로 들 수 있다. 서로 죽이는 것까지 불사하는 라이벌관계인 회사인데도 불구하고 좁은 도로를 하나로 두었다는 사실이 억지를 넘어 판타지로까지 다가온다.
 
 
 
===내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