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원 비상 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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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결의가 처음 발동되었던 시기는 [[기원전 121년]]으로, 이 때의 원로원은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등에 대해 원로원 비상 결의를 발동시켰다. 그들은 '공화정의 국제를 지키기 위하여' 시민의 권리를 일시 정지 시킨 후 그의 지지자 3,250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은 원로원 측이 불리하게 될 때에는 군대라도 동원하여 정치·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례에 없었던 무력 폭력의 한 예를 남기게 되었다.
 
원로원은 이후에도 이 권한을 자신들의 정적을 축출하는데 계속 사용하였다.[[기원전 100년]]에 마리우스파 [[호민관]] 사투르니누스를 제거했고, [[기원전 77년]]에는 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기원전 78년 집정관)|레피두스]](Marcus Aemilius Lepidus)를 비상 결의의 대상으로 지목하였고 곧 죽였으며, [[기원전 62년63년]]에는 원로원 의원이자 급진 개혁파였던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카틸리나]](Lucius Sergius Catilina)등에 대해 원로원 비상 결의를 발동시켜 로마에 체류한 원로원 의원, 법무관 등 요직에 있던 5명이 처형되었고 카틸리나 본인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이끌고 도주하였으나 곧 포위되었고 원로원은 그를 포함한 3,000명의 추종자를 학살해버렸다.
 
== 원로원 비상 결의의 종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