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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 타이거스 시절 ===
==== 1983년 ~ 1984년 ====
1983년 일본에 오면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 한신에 입단한 애당초에는 [[후지타 다이라]]가 [[1루수]]로 자주 기용된 적도 있어 [[우익수]]로서 수비를 하고 있었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전력질주를 할 수 없던 것과 후지타가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쇠약해진 것에서 나중에 1루수로
1983년에 바스는 방출될 가능성이 있었다. 작년 후반기에 팀이 큰 활약을 한 적도 있어 한신 팬들은 우승을 기대하였지만 4월에 2위로 종료했음에도 불구하고 5월 도중에는 1승 15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컨디션이 나빠진 바스가 팀 부진의 원인이라는 비판도 많았고 같이 입단했던 공을 방망이 중간에 잘 맞추는 스티브 스트로터가 일본 야구에 더 적합하다는 평가가 높아졌다. 그런 가운데 선발 투수진이 얇은 한신은 투수 리처드 올센을 획득했는데 올센을 1군에 승격시키기 위해 외국인 범위의 관계로 스트로터와 바스를 둘 중에 누군가를 방출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이 때 한신이 방출한 것은 스트로터였다. 당시 바스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를 모두 헛스윙 했지만, 구단은 바스의 파워 외에도 태도, 노력, 인격을 평가하였고 그 기대대로 바스는 단번에 컨디션을 회복하였다. 또, 1984년 시즌 종료 후에도 앞에 말한 수비의 불안으로 방출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것을 감독으로 갓 취임한 [[요시다 요시오]] 감독이 구단 프런트에게 바스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잔류시켰다고 한다.<ref>2008년(방송 날짜는 미상)에 방송된 [[아사히 방송|ABC TV]] 《토라반》 중에서</ref>
==== 1985년 ====
그 해에는 [[가케후 마사유키]], [[오카다 아키노부]]와 강력한 [[클린업 타자|클린업 타선]]을 형성, 같은 해 4월 17일 요미우리전에서 [[마키하라 히로미]]로부터 ‘[[백 스크린 3연발]]’중 1개가 바스의 시즌 제1호 홈런이다. 이 해에는 타율 3할 5푼, 54홈런, 134타점의 성적을 남기며 타격 부문 3관왕을 달성했고 한신의 21년 만에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또, [[센트럴 리그]]에서는 최초로 외국인 선수에 의한 [[일본 프로 야구 최다 홈런|홈런왕]]이
* 10월 8일 : [[다카노 히카루]]로부터 우익 방향에 48호 2점 홈런([[한신 고시엔 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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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0일 : 시즌 16승째를 올려 [[일본 프로 야구 최다 승리|다승왕]]이 확실되는 [[고마쓰 다쓰오]]로부터 좌측 폴대에 54호 2점 홈런([[나고야 구장]])
이 해에 [[오 사다하루]]가 1964년에 기록한 시즌 55호 홈런을 경신할지
한편, 이 고의 사구 공격의 영향으로 바스의 [[출루율]]이 상승했고 전날까지 9리 차이로 1위였던 [[요시무라 사다아키]](당일 4타석에서 출루는 없었음)를 마지막 타석에서 .0005차로 따돌리고 바스는 [[일본 프로 야구 최고 출루율|최고 출루율]] 타이틀도 석권하였지만 요미우리 벤치는 이 기록을 잊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바스는 당시 타격 부문 타이틀이었던 [[승리 타점|최다 승리 타점]]과 함께 타격 부문 5관왕을 달성했다. 참고로 바스는 기록을 두려워 하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를 펼쳤던 에가와를 높이 평가하고 “현재 일본 프로 야구 투수 가운데 최고의 투수다. 메이저 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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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스트라이크 존이 도입된 1986년 4월, 개막 경기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에서는 5타수 무안타를 기록했으나 8경기째에는 타율이 3할 대에 이르렀고, 5월에는 6경기 연속 멀티 안타를 기록하는 등 5월 하순부터 6월에 걸쳐 16타수 12안타로 타율 3할 6푼 9리에 올랐다. 5월 31일에는 그 해 처음으로 수위 타자로 나섰고 그 이후로는 물러나는 일 없이 타율을 한층 더 높이다가 7월 2일의 다이요전에서 5타수 4안타를 때려내 타율을 4할 2리까지 끌어올렸다.
7월 8일에 4할 7리를 기록하여 정점에 달한 이래 주니치의 [[고마쓰 다쓰오]]한테 4타수 무안타로 제압당해 타율이 4할 이하로 떨어졌고 그 후 25타수 무안타라는 극도의 슬럼프에 빠져 3할 7푼 6리로 낮아졌다가 8월에 들어간 12일에 3할 9푼 9리까지 다시
바스는 규정 타석에 도달한 이후 지금까지 [[장훈|하리모토 이사오]]가 보유하고 있던 시즌 타율 3할 8푼 3리라는 일본 기록을 넘어서면 일본 투수들이 더 이상 승부를 걸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감독에게 직접 호소해 이후 경기들은 출전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결국 타율이 그 이하를 기록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마지막까지 계속 타석에 섰다. 2013년 시즌 종료 기준으로 한신에서는 더 이상 홈런왕이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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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32세의 바스는 일본 구장에서는 좌측 방향에 서도 홈런을 날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좌익 방향으로의 홈런을 양산해 그 해 6월 26일에는 오 사다하루와 나란히 7경기 연속 홈런이라는 일본 타이 기록을 달성했다. 6월 18에는 다카노 히카루한테서 좌익 방향으로의 16호 솔로 홈런(한신 고시엔 구장), 19일 아라키 다이스케로부터 우익 방향에 17호 2점 홈런(한신 고시엔 구장), 20일 [[가쿠 겐지]]로부터 좌익 폴대에 18호 2점 홈런(한신 고시엔 구장), 21일 [[스즈키 다카마사]]로부터 좌익 방향에 19호 솔로 홈런(한신 고시엔 구장), 22일 [[히라누마 사다하루]]한테서 때려낸 몸쪽 포크를 좌익 방향에 20호 2점 홈런(한신 고시엔 구장), 24일은 신인 [[구와타 마스미]]가 던진 시속 114km/h의 한가운데 높은 커브를 백 스크린 우측 방향에 21호 2점 홈런([[고라쿠엔 구장]]) 등을 때려냈다.
일본 타이 기록을 달성한 26일에는 5대 5 상황에서 맞은 8회초에 120개 이상의 공을 던진 [[에가와 스구루]]를 상대로 타석 2구째에 날아온 시속 136km/h의 한가운데 높은 몸쪽 직구를 고라쿠엔 구장의 우익 장외에 있는 낚시용품점 지붕까지 날려보냈는데 이 홈런은 비거리가 약
그 밖에도 5월 30일에 열린 경기의 6회와 8회에 [[세키네 히로후미]]로부터 홈런을 때려내는가 하면 다음날 6월 1일에는 1회와 4회에 [[가케하타 미쓰노리]]로부터 홈런을 때려내며 이틀에 걸쳐서 4타수 연속 홈런, 13경기 연속 타점(앞에서 말한 7경기 연속 홈런부터 시작해서 7월 4일까지), 시즌 장타율 7할 7푼 7리(당시<ref>2013년에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7할 7푼 9리로 기록을 경신했다.</ref><ref>[http://www.asahi.com/sports/update/1008/JJT201310080009.html {{lang|ja|バレンティンが歴代最高長打率 86年のバース上回る}}] - 스포츠(아사히 신문 디지털)</ref>) 등 일본 기록을 연거푸 달성했다. [[OPS]]도 오 사다하루의 1.293(1974년)에 다음으로 역대 2위가 되는 1.258을 기록했다. 그러나 MVP에는 리그 우승 팀인 히로시마의 [[기타벳푸 마나부]]에게 내줘야 했다. 팀의 우승에 기여한데다 투수 부문 3관왕을 달성한 기타벳푸의 MVP 수상은 타당하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한편으론 바스가 MVP를 놓친 데에는 2년 연속으로 외국인 선수에게 MVP를 수여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관계자들이 꽤 많았다는 사실이 작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 1987년 ====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트레이드로 [[주니치
==== 1988년 ====
자신의 아들이 [[수두증]]을 앓고 있는 것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구단과 대립해 결국 시즌 도중에
퇴단 후 2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왕년의 한신 팬들로부터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하여 바스의 활약 이후 간사이 지역 언론에서는 한신의 새로운 외국인 타자가 스프링 캠프나 시범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경우 ‘바스가 되돌아 오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보도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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