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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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는 요동 지역을 정복한 이후 장성을 쌓아 이를 방어하려 하였으며, [[기원전 222년]]에 연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도 이 장성을 수리하여 경계로 삼았다. 이를 연진장성(燕秦長城)이라 부르는데, 대체로 요동군의 경계 지역을 대부분 아우른다고 본다.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연진장성이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 하류까지 도달했다고 비정하고 있으나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압록강]] 이북의 연진장성만 인정한다.<ref>[[만리장성]]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ref>
 
[[한나라]] 시기의 요동군은 고조선 및 [[부여]], [[고구려]] 등을등의 다스리고초기 견제하는국가들을 견제하고 다스리는 기능을 하였다. 부여는만주 주로지역의 한나라와여러 우호초기 관계를부족 맺고집단들은 공동으로요동 고구려와및 현도군에 예속되어 대립하였는데있었으며, 요동군으로부터 지배자의 위세품을 받아 권위를 세우고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고구려가 1세기 초 이후 강한 예속 관계에서 벗어나 한나라와 대립하면서 요동군은 그 최전선으로 오랫동안 고구려와 전쟁을 치렀다. 부여는 주로 한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공동으로 고구려에 맞섰다. 한편으로 한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던 요동군은 본국이 혼란에 빠지면 군벌이 형성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는데, [[3세기]]에는 [[공손탁]]이 군벌화되어 수십 년 동안 요동 지역을 다스렸다. 북중국에서 혼란을 수습하고 성립된 [[위 (삼국)|위]]나라는 [[238년]]에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강]]을 정벌하고 요동군을 다시 편입하였다. [[서진]](西晉)이 성립된 후 고구려 및 [[모용부]]의 압박으로 요동군은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서진이 멸망하고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이 시작되자 요동군은 더욱 쇠퇴하였으며 [[319년]]에 모용부에게 정복되었다.
 
모용부는 [[전연]]을 건국하여 요서 및 요동군을 배후지로 북중국 일부를 정복하였으나 [[370년]]에 [[전진 (오호십육국)|전진]](前秦)에 의해 멸망하였다. [[384년]]에 [[모용수]]가 다시 [[후연]]을 건국하여 요동군을 차지하였으나, 고구려의 압박으로 요동군은 더욱 쇠퇴하였으며 [[5세기]] 초에 [[광개토왕]]이 요동군을 완전히 정복하여 소멸되었다. 후연은 랴오닝 성 서부에 요동군을 교치하여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북제]]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