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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2년에 제후국에서 태후를 쓰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지적으로 이후부턴 왕비가 서거하면 태(太)를 뺀 왕후로 추존토록 결정<ref>《조선왕조실록》세종 48권,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4월 6일(을해) 5번째기사</ref>하였는데 이땐 이미 [[신덕왕후]]의 왕후직과 권리가 모두 철폐된 상황이었다. 세종 12년 음력 4월 6일을 시점(始點)으로 조선의 국모는 왕비에 봉작되었다가 사후에 왕후로 추존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고종 31년까지 지속된다.
 
이후 고종 31년에 왕실의 존칭이 개칭하면서 왕의 적배를 왕비로 삼았다가 왕비가 사망한 후에 왕후로 추존하는 옛 규례를 폐지하고 왕의 적배를 왕후로 삼도록 제도가 개정되었고 경칭 역시 전하에서 폐하로 바뀐다.<ref>《조선왕조실록》고종 32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12월 17일(기미) 1번째기사</ref><ref group="註">중국 황실에서 폐하를 쓰는 건 오직 황제 뿐으로, 황후의 공식 경칭은 황태자와 동등히 전하이다.</ref> 조선 역사상 살아생전 왕후에 봉작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이 바로 훗날 대한제국의 수립 후 [[명성황후]]로 추존되는 민씨이다.<!--그러나 다음해인 고종 32년에 발생한 을미사변의 연장으로 일제의 압박 아래 대행왕후 민씨가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고<ref>《조선왕조실록》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2일(경인) 1번째기사</ref>, 다음 날 [[조선 고종|고종]]의 특사(特賜)로 후궁의 작위인 빈(嬪)으로 책봉되었다가<ref>《조선왕조실록》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3일(신묘) 2번째기사</ref>, 이 해 10월 궁에 무력 진입하여 일국의 국모를 시해한 일제의 만행에 대한 국내외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일제와 [[김홍집]] 내각은 폐후(廢后)에 관한 조칙이 무효화되었고 다시 왕후로 복작되었다. 고종 34년 1월에 이르러 대행<ref group="註">대행(大行)은 서거한 왕과 비의 시호가 결정되기 전까지 작위 앞에 붙이는 칭호이다. 대행왕, 대행대왕, 대행왕비, 대행왕대비, 대행대왕대비, 대행왕후를 쓴다.</ref>왕후 민씨의 시호(諡號)를 문성으로 정하여 문성왕후가 됐다가 이 해 3월 시호를 개망해 명성왕후로 개칭했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