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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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난 1시간여 후, 강풍과 파도 속에서 어선과 헬기와 군경 함정을 동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되어,<ref name="동아_3"/> 10월 10일 22시까지 모두 8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51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ref name="경향_1"/>
 
초기에는 사망·실종자를 140명으로 추정하였으나, 시신의 인양이 진행되면서 사망자수가 크게 늘어났다.<ref name="경향_5">안전 무시·誤判운항 추정, 《경향신문》, 1993.10.12</ref> 10월 15일에는 선장과 기관장, 갑판장의 시신이 침몰한 선박의 조타실에서통신실에서 발견되었고,<ref name="매경_3동아_11">"도주했다"지명수배받던死亡 선장등확인 3명승무원 死體인양유족 서해훼리오열"살아있다고 욕하더니…", 《매일경제동아일보》, 1993.10.16</ref> 11월 3일에는 신고된 마지막 실종자를 끝으로 모두 292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ref name="경향_6">마지막 실종자 발견, 《경향신문》, 1993.11.3</ref>
 
선체의 인양에는 구조함인 [[구미함]]<ref>2014년 300명 정도 사망한 [[세월호]]에는 구미함의 후속함이자 한국 최초 국산 잠수함 구난함인 [[청해진함]]이 투입되었다.</ref>의 특수대원, 9,754톤급의 해운항만청 소속 인양선 설악호, 206톤급의 예인선, 52톤급의 양묘선과 이들에 탑승한 200여 명의 승무원이 참여한다고 보도되었다.<ref name="경향_7">4개船團 27척 인양작전, 《경향신문》, 1993.10.1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