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만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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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오진키(應神紀)」는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하여 [[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목라근자는 마찬가지로 《일본서기》에만 이름이 보이는 백제의 장수로서,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에 해당하는 [[369년]] 당시 백제-왜의 연합군이 [[신라]]를 쳐부수고 가야 지역을 평정할 때 백제군을 지휘하였고, 이때 얻은 신라인 여자에게서 목만치를 낳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목만치는 아버지 목라근자의 공으로 임나의 일을 도맡아보며 백제와 왜 양국을 오고갔으며, [[오진 천황]] 25년([[294년]], 보정연대 [[414년]])에 [[전지왕|직지왕]](直支王)이 죽고 [[구이신왕]](久尓辛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ref>실제로 전지왕이 사망한 것은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술에 따르면 재위 16년만인 [[서기 420년]]의 일이다. 구이신왕은 [[427년]]까지 재위하였다.</ref> 국정을 장악하였다.<ref>《일본서기》는 목만치의 국정 장악을 기술하면서 「대왜(大倭)의 목만치」라 하여 그가 왜인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기도 하지만, 《일본서기》의 다른 사본인 다나카본(田中本)에는 「대왜」라는 글자가 없을 뿐 아니라 《백제기》를 인용한 세주에서 목만치의 아버지를 목라근자로 기술한 점을 볼 때 목만치를 백제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노중국, 『백제사회사상사』 2010년, 지식산업사, p.166).</ref> 왕모(즉 구이신왕의 어머니인 [[팔수부인]])와 간통하여 온갖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는 등 권세를 휘두르며 전횡하였고, 왜의 오진 천황은 그것을 듣고 목만치를 왜로 불러들였다고 한다.<ref> 《일본서기》, 오진키 25년조 「廿五年, 百濟直支王薨. 卽子久爾辛立爲王. 王年幼, 大倭木滿致執國政, 與王母相婬, 多行無禮. 天皇聞而召之.【百濟記云 『木滿致者, 是木羅斤資討新羅時, 娶其國婦而所生也. 以其父功專於任那, 來入我國往還貴國. 承制天朝執我國政, 權重當世. 然天皇聞其暴召之.』】」</ref>
 
== 「목만치」와 「목협만치」그리고 「소가노마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