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루 1세 (브라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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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루 1세'''({{llang|pt|Pedro I}}, [[1798년]] [[10월 12일]] ~ [[1834년]] [[9월 24일]])는 [[포르투갈 왕국]] 왕실 출신으로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이다(재위 [[1822년]] ~ [[1831년]]). '''페드루 4세'''({{llang|pt|Pedro IV}})의 이름으로 [[1826년]] 약 2개월간 포르투갈 왕국의 왕도 일시 겸하였다.
 
[[페드루 3세 (포르투갈)|페드루 3세]]와 [[마리아 1세 (포르투갈)|마리아 1세]]의 손자이며, [[주앙 6세 (포르투갈)|주앙 6세]]의 아들이다. 어머니 [[스페인의 카를로타 조아퀴나]]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 (스페인)|카를로스 4세]]의 딸이다. [[리스본]]에서 태어난 그는 왕실이 [[나폴레옹 전쟁]]의 참화를 피해 식민지 [[브라질]]로 피난가면서 [[1807년]] 말 브라질로 향하여 [[1808년]] 초부터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지냈다. 조모 마리아 1세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가 주앙 6세로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의 왕으로 올랐고, 주앙 6세가 [[1821년]] 포르투갈로 귀국한 후에도 그는 계속 브라질에 머물러 있었다.<ref name="포에즐">볼커 포에즐, 《포르투갈》 김미영 역, 휘슬러, 2005, p.39</ref>
 
그 후 포르투갈 본국 의회에서 연합 왕국을 해체하고 브라질을 식민지의 지위로 되돌리려 하자 브라질인들이 반발하였고, 그는 이에 편승하여 [[1822년]] [[9월]]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ref name="포에즐"/><ref name="김상훈">김상훈, 《통아메리카사》 다산에듀, 2011, p.162~p.163</ref> 즉위 초 국민들의 지지 열기가 높았으나, 내부의 대립으로 그 열기는 식어갔다. 대립을 진압하기 위해 전제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택해 반발은 더욱 심해졌으며, [[우루과이]]를 놓고 벌인 [[아르헨티나]]와의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전쟁]]에서 패해 [[1828년]] 우루과이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인기가 더욱 떨어졌다.<ref name="김상훈"/> 그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으로까지 발전하자 그는 [[1831년]] 불과 5세인 아들 페드루([[페드루 2세 (브라질)|페드루 2세]]가 됨)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ref name="김상훈"/>
 
한편 그는 부친 주앙 6세가 [[1826년]] [[3월]] 세상을 떠난 후 [[페드루 4세 (포르투갈)|페드루 4세]]로 약 2개월간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을 겸했다. 브라질에 있으면서 왕위를 당시 불과 7세인 딸 마리아 다 글로리아에게 물려주기 위한 활동을 펼쳐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마리아 2세]]로 즉위할 수 있게 했다. 마리아가 어렸기 때문에 페드루의 동생 [[미겔 (포르투갈)|미겔]]이 섭정을 맡았던 가운데, 포르투갈로 돌아간 후로는 미겔의 왕위 찬탈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 [[1834년]] [[5월]] 미겔을 추방하여 그 뜻을 관철시켰다. 그 후 그 해 [[9월]], [[결핵]]으로 자신이 태어났던 [[켈루스 궁전]]에서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전제적인 통치 스타일과 왕위 계승 문제로 시끄러웠지만, 예술을 옹호한 업적이 있으며, [[1834년]]부터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의 [[포르투갈 왕국의 국가]] 작곡자이기도 했다.
 
== 주석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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