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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고려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순천시 (평안남도)|자주]](慈州)<ref>현재의 [[평안남도]] [[순천시 (평안남도)|순천시]]</ref>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계군|신은현]](新恩縣)<ref>지금의 황해북도 신계군</ref>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 귀주대첩 ===
{{본문|귀주 대첩}}
 
강감찬은 [[자산군순천시 (평안남도)|자주]](慈州)와 [[신계군|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성시|구주]](龜州)<ref>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ref>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 전쟁 결과 ==
익명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