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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로마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사정에 대해 무지했던 하드리아노 6세는 자신이 교황으로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로마에 자신을 위한 숙소를 마련해 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File:SantaMariaAnima-TombaAdrianoVI01-SteO153.JPG|thumb|upright|[[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니마 성당]]에 있는 하드리아노 6세의 무덤]]]
 
==교황==
하드리아노 6세는 과거에 [[스페인]]에서 일할 때도 말과 풍습이 달라 어려움이 많았는데 [[로마]]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파일:Santa maria dell'anima, tomba di adriano vi.JPG|thumb|200px|하드리아노 6세의 무덤]]
하드리아노 6세는 문예 부흥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인문주의자들과 요한 에크, 루이스 비베스의 사상을 일찍이 잘 알고 있었고 [[에라스무스]]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고, 벨그라드가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자 [[1522년]] [[몰타 기사단|성 요한 기사단]]의 [[로도스 섬]]마저 함락되었다. [[교황청]]은 재정적으로 늘 적자였고 [[개신교]]의 세력은 급속도로 번져 나가고 있었으므로 교회 쇄신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들은 하드리아노 6세의 그러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하드리아노 6세의 쇄신 훈령이 수용되지도 않았다. 하드리아노 6세는 [[16세기]]의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교회 개혁을 시도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위 20개월 만에 선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