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진주성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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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투 정보
|분쟁 = 제2차 진주성 전투공방전
|전체 = [[임진왜란]]
|그림 = 진주성전투지도진주성공방도.gif
|설명 = 진주성을 공격하고 있는공격하는 가토 기요마사의 모습기요마사.
|날짜 = [[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 ~ [[7월 27일|27일]]([[음력 6월 29일|29일]])
|장소 = [[조선]]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br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결과 = 일본군의왜군 승리<br />진주성 함락과 일본군왜군 퇴각철수
|이유 =
|교전국1 = [[파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center|90px]]<center>[[조선|조선 왕국]]<center>
24번째 줄:
[[파일:Hidari mitsudomoe.svg|17px]] [[고바야카와 다카카게]]<br />
[[파일:Japanese crest Tachibana.svg|17px]] [[다치바나 무네시게]]<br />
|병력1 = 조선 관군 약3천~3천8백명 명에서 3천8백 명 <br /> 6만 여명(군민{{ja-y2|城民|성민}}, 의병)
|병력2 = 약 10만 명
|사상자1 = 6만 명 전원 사망전사(진주성 군민진주성민 전원 학살피살)
|사상자2 = 2-3만2만여 명에서 3만여 명 사상
|기타 =
}}
 
'''제2차 진주성 전투방어전''' [[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부터 [[7월 27일|같은 달 27일]]([[음력 6월 29일]])까지 [[진주성]]에서 조선군 3천여 명의명과 조선군과조선 민간인 6만여 명의명과 민간인 그리고왜군 10만여 명의 일본군과의명이 벌어진벌인 전투이다공방전이다. 이 전투에서공방전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진주목사 [[서예원]]을 비롯하여,비롯해 지도부 [[김천일]], [[최경회]] 위시해 대부분의대부분이 지도부가전사하거나 남강에진주 투신하거나 전사를남강에 하였다투신했다.
 
== 배경 ==
[[임진년]] [[1592년]] 11월 8일([[음력 10월 5일]])부터 13일([[음력 10월 10일|그달 10일]])까지 6일간에 걸쳐 병력3만의 병력으로 총공세를3만으로 펼쳤다가총공격하다가 실패한 일본군은왜군은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고 [[진주대첩]] 보복을 위하여 집요하게보복코자 진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집요히 준비했다. 이듬해익년 [[계사년]] [[1593년]] 거의 모든 일본군을왜군을 동원한 10만과 800척의선박 선박을800척을 동원하여,동원해 [[함안]], [[진주시|반성]], [[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에 다시재공격에 나섰다. 조선 조정과 야전지휘관들은야전 [[일본]]군이지휘관들은 왜군이 이처럼 모든 전력을 [[진주성]] 하나에 투입하는 전략적전략상 모험을 하리라고모험하리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 명확한 판단을 할명확히 판단 없는불능한 상태였다.
 
당시 [[명나라|명]] [[일본]]군이왜군이 화의를 교섭하고 있었는데 [[일본]]군과의왜군과의 전면전을 통하여 전쟁을이용해 속히 종결하기를종전하기를 원하던 [[조선]]은 협상에서 사실상 배제되었고배제됐고 [[조명연합군|명조연합군]]의 추격도 멈추었다. [[일본]]군은왜군은 이 때를이때를 이용해 [[진주성]]을 총 공격 하게된다총공격한다. [[진주성]] 안에는내에는 관군 수천 명의 병사만이명만이 있었고, 사실상의 전투력은 부족했다.부족한 게다가데다가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명]]군에게 요청한 [[진주성]]으로의 원군 투입이 거절되자 방어가 불가능하다고불능하다고 판단하여판단해 수성을{{ja-y2|守成|수성}}을 포기하라는 명을 내렸다명했다. 도원수 [[권율]]과 홍의장군 [[곽재우]]조차도 진주성에서 10만의왜군 일본군을10만 상대하는명을 것은방어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하여판단해 방어전을 반대하였다. 그러므로반대했으므로 [[진주성]] 이외의 명·조선군은명군과 조선 관군은 방관 상태에 있어 성은진주성은 완전히고립무원 고립된 상태였다. 하지만상태였지만 방어사 [[황진]] 의병장들은 여러 권고에도 불구하고진주성에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것을싸우겠노라 결의했다.
 
== 제2차 진주성 전투공방전 ==
=== 조선군조선 관군 ===
사태가 급박해지자, {{ja-y2|倡義使|창의사}} [[김천일]]이 군사의병 3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로진주성으로 왔고, 충청병사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이 관군 7백 명, 경상우병사경상도 우병마절도사 [[최경회]]가 관군 5백 명을, 의병 복수장{{ja-y2|烽燧將|봉수장}} [[고종후]]가 의병 4백 명, 부장 장윤이 의병 3백 명, 의병장 이계련이 의병 1백 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이 의병 3백 명, 의병장 민여운이 의병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목사 서예원과 [[김준민]], [[이종인]] 등과{{ja-y2|守成|수성}}할 수성을방도를 논의했다.<ref> {{웹 인용
|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2607016_005&grp=&aid=&sid=1633739&pos=7
|제목 =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공방전의 자세한 경과
|확인일자확인일 = 2008-12-05
|저자 = 《선조실록》 40권 26년
|작성일자작성일 = 1593-7-16
|출판사 = 조선왕조실록
|원본일자 =
|인용 = 아래 전투공방전 부분 모두
}} </ref>
 
=== 전투 ===
[[파일:진주성 전투.jpg|thumb|left|320px|사륜거를 사용하는 일본군왜군]]
[[7월 19일]]([[음력 6월 21일]]) 일본군왜군 기마병 2백여 기가 출몰하여 진주성을 살피고 돌아갔다.
 
[[7월 20일]]([[음력 6월 22일]])에는 처음 교전이 일어나 일본군왜군 30여 명을 쏘아 죽이니 퇴각을 하였다가,퇴각하였다가 초저녁과 2경, 3경에 다시재공격해 공격을왔다가 해왔다가퇴각하였다. 퇴각을조선 하였다.관군은 조선군은 남쪽에는남측에는 남강이 흐르기 때문에흐르기에, 침입이 예상되는 서북쪽에서북 해자를측에 {{ja-y2|垓字|해자}}를 파고, 물을 흘려 호를{{ja-y2|壕|호}}를 만들었으나, 일본군은왜군은 해자에 흙을 메워 길을 만들었다.
 
[[7월 21일]]([[음력 6월 23일]]) 낮에 3회, 밤에 4회를 공격을 하였고,공격하였고 24일에는 적의 증원군 1천여 명이 동서로 진을 쳐서 포위하였다.
 
[[7월 23일]]([[음력 6월 25일]]) 일본군은왜군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흙으로 만든 대를{{ja-y2|臺|대}}를 세워 성안으로성내로 사격을 퍼부었다사격했다. 이에 충청병사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도 성안에 다시성내에 높은 언덕을 쌓아 대처를 하였으며,대처하였고 낮의 세 차례 공격과 밤의 네 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다.
 
[[7월 24일]]([[음력 6월 26일]]) 일본군은왜군은 방책을 만들어,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화전 공격을 하여공격해 성내의 초옥을 불태우면서, 맹렬한맹공격했고 공격을 퍼부었고전서를 다시 전서를 보내 항복을 독촉한다. 이 날도 밤낮으로주야로 일곱 차례를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7월 25일]]([[음력 6월 27일]]) 일본군은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에 다섯언덕 군데의다섯 언덕을군데를 축조하고 거기에 공성용 대나무 대를{{ja-y2|臺|대}}를 세워 하향 조준으로 사격을사격하여 하여조선 조선군관군 300여 명을 죽였고, 철갑을 입고 사륜거라는 장갑차를 끌고 와, 철추로 성문을 뚫으려 했다. 장사였던 김해부사김해 {{ja-y2|都護府使|도호부사}} 이종인이 연거푸 적을 연거푸 베어 물리치고, 조선군은조선 관군은 기름과 햇불을횃불을 던져 일본군에 대항하여왜군을 격퇴시켰다격퇴했다.
 
[[7월 26일]]([[음력 6월 28일]]) 야간 경비가 소홀하여소홀해 적이 몰래와서몰래 와서 성을 뚫으려하는 것을 힘들게 방어를 했으며방어했으며, 1천여 명의 적이명이 죽었는데 황진도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를 하였다전사하였다.
 
=== 함락 ===
[[파일:Choksuk pavillion in Jinju Castel.JPG|thumb|250px|순국선열의 넋이 깃든 촉석루]]
[[7월 27일]]([[음력 6월 29일]]) 전사한 황진을 대신하여 목사 [[서예원]]이 경비대장을 맡았으나, 겁을 먹고겁먹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떨어뜨리자 하자경상도 경상우병사우병마절도사 [[최경회]]가 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그 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죽게 된다전사한다. 오후에 비가 내려 동문의 성이 무너지자 일본군은왜군은 노도와 같이 밀려왔는데, 활과 화살로 대응을 하지대응하지 못하므로 창과 칼로 육박전이 일어나게 되고,일어나고 이종인도 일본군의왜군의 탄환을 맞고 죽게 된다전사한다. [[김천일]]도 [[촉석루]]로 모여 항전을항전하다가 하다가 아들과 함께아들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투신해 죽는다. 이때 최경회와 여러 장군도 남강에 투신하여투신해 죽게 된다죽는다.
 
== 결과 ==
성에 진입한 일본군은왜군은 모든 거주민과 살아있는 동물을 모두 학살하고 주변을 약탈했다.약탈했으나 그러나 전투에서공방전에서 심한 손실을 입어 전라도로의전라도 진출은 좌절되었고, 조선군이조선 관군이 부산으로부산포로 이동하자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으며,퇴각한 이후 진주성은 왜군의 방어선에서도 제외된다.
 
== 창렬사 ==
{{본문|창렬사 (진주시)}}
[[파일:ChangRyeol shrine.jpg|thumb|200px|left|임진왜란 전몰자를 모신 창렬사]]
경상도관찰사경상도 관찰사 정사호는 진주성에 순국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기리고자 창렬사를 건립하여 1607년 선조 40년에 사액을 {{ja-y2|賜額|사액}}받는다. [[1868년]] [[대한제국 고종|고종]] 5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서원철폐령]]으로 탓에 [[김시민]] 장군을 모신{{ja-y2|配享|배향}}한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모시게창렬사에 된다모신다. 창렬사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김시민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상석에 모셔두었고, 창의사 김천일과 충청도 병마사병마절도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병마절도사 최경회 등의 임진왜란 순국순국선열 선열 39인의 신위를39위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ja-y2|祭香|제향}}한다.
 
== 논개 ==
[[파일:The rock of loyalty monument.jpg|thumb|250px|의암사적비]]
{{본문|논개}}
[[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였는데,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제2차 [[진주성]] 전투를공방전에 참여할성안에서성내에서 전투의 뒷수발을전투를 들었다지원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전사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벌일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끌어안아끌어안은 함께 [[남강 (경상도)|남강]]에 떨어져몸을 던져 죽었다.<ref> {{웹 인용 |url = http://www.nongae.or.kr/info/intro01.html
|제목 = 논개의 생애
|확인일자 = 2008-11-16
91번째 줄:
|인용 = }} </ref>
 
[[1625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의 백성들의백성의 뜻에 따라 정대융이 의암({{ja-y2|義巖)|의암}}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ref> {{웹 인용
|url = http://www.nongae.or.kr/info/remains02.html
|제목 = 의암바위
101번째 줄:
|인용 = }} </ref> 의암 바로 위쪽으로는 의암사적비가 서 있다.
 
[[1739년]](영조 16년)에 논개를 추모하는 [[의기사]]가 세워지고, 의기로 추모받게 되었다.
 
== 유적 ==
[[파일:Jinju castle-jungchungdanby.jpg|thumb|250px|촉석정충단비(시도지정유형문화재 2호)]]
[[파일:Jinju battle memorial monument.jpg|thumb|250px|임진대첩계사순의단]]
진주성에는 [[1592년]] 임진란의임진 전쟁의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높이숭상하고 받들고, 이듬해익년 [[1593년]] 계사년에 순국한 7만 민관군의성민과 충혼을관군의 위령하기충혼을 위해,위령코자 [[1686년]]([[조선 숙종|숙종]] 12년)에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를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장사]](三壯士)라는 기록이 종종 눈에 보이는데, [[김천일]], [[황진]], [[최경회]]를 일컫는다.<ref> {{웹 인용 |url = http://www.idomin.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55910
|제목 =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
|확인일자 = 2009-2-15
113번째 줄:
|출판사 = 경남도민일보
|원본일자 =
|인용 = }} </ref> (실록에는 이노 등도 언급됨) 비문에는 이들과이 영현들과 순국한 민관군성민과 7만의관군 영령을7만 위로명의 하기영령을 위해위로코자 촉석루 동쪽에동측에 정충단을 세우고, 정충단비를 같이 세웠다.
 
[[1987년]]에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을 만들어 설치를 하였다설치하였다. 촉석루 맞은 편에맞은편에 설치된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아래에는 호국의 종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제1호인 김시민장군 전공비가 나란히 서 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