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드리아노 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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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루터파]]의 봉기에 대해 하드리아노 6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다. 1522년 12월 개회된 뉘른베르크 의회에서 프란체스코 키에리카티가 하드리아노 6세를 대신하여 참석하였는데, 사적 훈시에서 그는 교회 내 혼란은 무엇보다 [[로마 교황청]]의 책임이 가장 크며, 따라서 로마 교황청은 개혁되어야 한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ref>Pigafetta, Antonio and Theodore J. Cachey, ''The first voyage around the world, 1519–1522'',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07), 128.</ref><ref>Hans Joachim Hillerbrand, ''The division of Christendom: Christianity in the sixteenth centur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7), 141.</ref> 하지만 과거 신학 교수와 이단심문관을 지냈던 하드리아노 6세는 또한 교리의 변경에 단호하게 반대함과 동시에 [[마르틴 루터]]는 [[이단]]적인 주장을 펼친 죄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로마 시민들은 하드리아노 6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않았던 로마 시민들은 그를 야만인으로‘야만인’으로 간주하며 자주 풍자의 대상으로 삼곤 하였으며, 그가 선종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하기까지 하였다.
 
1523년 9월 14일 하드리아노 6세는 재위 20개월만에 선종하였다. 그가 선종한 후, 그의 훈령 대부분은 파기되거나 없어져 버렸다. 하드리아노 6세의 무덤은 산타 마리아 델라니마 성당에 마련되었다. 이후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으로서는 그를 마지막으로, 교황의 자리는 1978년 폴란드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나올 때까지 456년 동안 오직 이탈리아인에게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