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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박의중'''(朴宜中, 1337년 ~ 1403년)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다. == 참고 문헌 == * 고려사 * 태조실록 * 태종실록 ==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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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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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중(朴宜中,; 1337년] ~ [1403년])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다. 자는 자허(子虛), 초명은 실(實)이며 밀성(密城:지금의 밀양시) 사람이다. 판도총랑(版圖摠郞) 인기(仁杞)의 아들이며, 1315년(충숙왕 2) 과거에 장원하여 충선왕을 티베트까지 시종하여 진성병의익찬공신(盡誠秉義翊贊功臣)이었으며, 충목왕의 사부인 박인간(朴仁幹)의 조카. 보통 이색의 문인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색과는 사재에서 함께 수학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6세 때인 공민왕 11년(1362)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전의직장이 된 뒤에 여러 직을 거쳐 31세인 공민왕 16년(1367)에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자 정몽주, 박상충, 김구용, 이숭인 등과 함께 성균관 학관을 겸직하였는데,정도전의 포은봉사고서에서 박의중의 논설이 가장 정밀하였다고 적고 있다.삼봉 정도전은 말하기를 "일찍이 목은 이색 선생이 성리학의 맹주가 되어 유학을 완성하려 할 때 정몽주를 평하여 '호방하고 탁월하다' 하였고, 박의중의 평하여 '치밀하고 정절하다'라고 하였는데, 두 사람이 목은 선생을 만난 것은 하늘의 뜻이요, 목은이 두 사람의 인재를 얻은 것도 하늘의 뜻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유학의 흥기에 이미 박자허가 시작에 참여 했으니 마땅히 마치는 것도 그와 함께 하겠다'"라고 하였다.(삼봉집)
'''박의중'''(朴宜中, [[1337년]] ~ [[1403년]])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다.
성리학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박의중의 비중이 이처럼 큰 것임에도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왕권 교체기에 정치인이 아니라 순수한 학자였기 때문에 역사에 뭍혀버렸다고 할 수 있다.
 
우왕 때 문하사인에 제수되었고, 좌사의대부로 승진하여 우왕의 방자 무도함을 지극으로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후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겼다가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된 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자 사신으로 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다.당시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은 대개 금은과 토산물을 가지고 가서 채색 비단이나 자질구레한 물품들을 사오는 사무역을 하였는데, 이를 보고 중국에서는 “고려 사람은 중국에 공물을 바친다는 핑계를 내세우고 오직 장사에만 마음이 팔려 있다.”라고 비난할 정도로 공공연 하였다. 따라서 명나라 요동호송진무(遼東護送鎭撫) 서현(徐顯)이 포(布)를 요구하자 박의중은 행장을 털어 보여준 후 입고 있던 모시옷을 벗어서 그에게 주었다. 서현이 그의 청백함에 탄복하여 예부관(禮部官)에게 보고하자 명나라 황제가 예부관에 명하여 회동관(會同館)에서 박의중에게 잔치를 베풀고 철령위(鐵嶺衛)를 세우자는 계획도 중지시켰다. 이후 창왕이 즉위하여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의 호를 내려주었다.공양왕 2년(1390) 밀직제학으로 동지경연사를 겸임하였다. 이어 미신과 같은 풍수설로 인한 한양천도의 부당함을 설파하였다. 이어 성균관대사성겸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고려사 열전)
 
56세인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이성계는 정도전, 정총과 함께 고려사 편찬을 명했으나 사료만 남기고 외가인 김제로 떠나버렸다. 조선 태종은 즉위 즉시 검교참찬의정부사의 직을 내려 불렀지만 받지 않았고, 태종3년(140) 67세의 일기로 김제에서 세상을 떠났다. 박의중은 고려사열전에 보일 정도로 고려조의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그가 살아간 시대는 대외적으로 元明 교체기였고, 대내적으로는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는 격변기였다. 당시 고려는 오랜 기간에 걸친 무신정권의 하극상과 원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국가적 기틀이 뿌리채 흔들렸고, 대내외적으로도 정치적 대응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시기에 정치인이 아닌 순순한 학자로써 박의중은 조선조가 들어서면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목은 이색이 정재기를 지었고, 그의 후학인 양촌 권근이 태종1년(1401) 스승을 위하여 '자허설'을 지었다. 그가 죽은 뒤 동향의 제자 춘정 변계량이 만장을 들었고, 성리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양촌 권근이 제문을 지어 그를 떠나 보냈다. 저서로는 정제일고가 있고, 시호는 문경이다.
 
== 참고 문헌 ==
* [[고려사]]
* [[태조실록]]
* [[태종실록]]
* [[정제일고]]
 
* [[삼봉집]]
== 바깥 고리 ==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1337_1_0004612&isEQ=true&kristalSearchArea=P
 
 
[[분류:1337년 태어남]]
[[분류:1403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