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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년]] 2월 형 [[북송 철종|철종]]이 아들이 없이 승하하자, 제8대 황제로 즉위한 [[송 휘종]]은 서화 등의 예술에 뛰어난 솜씨를 가졌고, 예술에 관한 식견도 탁월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지나친 그의 집착은 정도가 지나쳐서 나랏일에 소홀히 하여 훗날 [[금나라]]로 붙잡혀가는 계기가 된다.
 
휘종은 각종 예술품을 수집하기 위해 [[항저우|항주]](杭州)에 명금국(明金局)이라는 정부기관을 설치했으며{{출처}}, 전국 각지에서 기화요초를 수집하여 대궐을 장식하도록 한 '화석강'(花石綱)을 실행하고 이를 주관하는 조정 기관인 응봉국(應奉局)을 설치하였다.<ref>{{웹 인용|url = http://zh.wikisource.org/wiki/%E5%AE%8B%E5%8F%B2/%E5%8D%B7022|제목 = 宋史 本紀第22 徽宗四|확인일자 = |저자 = |작성일자 = |출판사 = 宋史|원본일자 = |인용 = }}</ref>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빼어난 화석을 수도 [[카이펑|개봉]](開封)으로 실어오게 했다.
 
과도한 예술활동으로 말미암아 필요한 예산을 편법으로 수취하기도 했다. 토지를 측량할 때 기존보다도 짧은 길이를 이용하고, 그것에 의해 발생한 잉여 논밭을 강제적으로 국고에 편입하거나, 매매계약서가 애매한 토지를 몰수하는 등 무리한 수단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