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평릉의 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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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평릉의 변'''(高平陵-變)은 [[249년]] [[삼국 시대]] [[위 (삼국)|위나라]]의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있던 [[조상 (조위)|조상]]과 그 일당을 처형한 사건으로 이로써 위나라의 세력 판도는 조씨 정권에서 사마씨 정권으로 넘어간다.
 
== 배경 ==
서기 [[238년]] 경 [[위나라]]의 황제 [[조예]]가 중병으로 쓰러지고 조예는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에 [[조예]]는 후사가 없어 예전에 극비리에 입궐시킨 [[조방]]을 후사로 삼고 연왕 [[조우]],무위장군(3품계)[[조상]],둔기교위(4품계)조조,영군장군(4품계)[[하후헌]], 효기장군(4품계)[[진랑]] 등에게 조방을 부탁한다. 그러자 위협감을 느낀유방과 손자가 일을 꾸며 조상을 대장군으로 봉하게끔 조예를 설득하고, 당시 태위(1품계)였던 [[사마의]]를 그 보좌역이란 명목으로 조상을 견제하게끔 설득한다. 그 다음 [[하후헌]],조조,[[진랑]]을 파직시킨다. 그렇게 되자 만약 조상과 [[사마의]]가 섭정을 맡게 되면 정국이 혼란스러워질 것을 안 조예는 [[조우]]를 불러 뒷일을 논의했고 [[조우]]는 [[사마의]]를 불러들이지 말라고 한다. 이에 다급해진 유방과 손자는 조예에게 조서를 써 [[사마의]]를 불러들이라고 말한다. 이에 [[사마의]]는 돌아왔고 [[조우]], [[하후헌]], 조조, 진랑은 쫓겨난다.
[[239년]] [[위 (삼국)|위]](魏)의 2대 황제 [[조예]](曹叡)가 죽고 [[조방]](曹芳)이 즉위하자즉위, 대장군(大將軍) [[조진]](曹眞)의 아들 [[조상 (조위)|조상]](曹爽)이 정권을 잡았다. 그의 빈객은 500명에 달했고, 그 중 [[하안]](何晏) · [[등양]](鄧颺) · [[이승]](李勝) · [[정밀]](丁謐) · [[필궤]](畢軌) · 대사농(大司農) [[환범]](桓範)이 조상의 측근이 되어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조상은 하안의 건의로 [[사마의]](司馬懿)를 태부(太傅)로 삼고 병권을 장악하여 동생 [[조희 (조위)|조희]](曹羲)를 중령군(中令軍), [[조훈]](曹訓)을 무위장군(武威將軍), [[조언]](曹彦)을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고 각각 어림군 3000명을 거느려 맘대로 궁에 드나들게 했으며, 하안 · 등양 · 정밀에게는 상서(尙書) 벼슬을 내리고 필궤는 사례교위(司隷校尉), 이승은 하남윤(河南尹)으로 삼아 조상의 세력은 날로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