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강화 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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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의 그 어느 국가나, 그 누구도 아무도 김규식 일행의 [[한국]] 독립 청원을 호응해주지 않게되면서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고,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ref name="in33"/> [[8월 9일]] 김규식은 김복, [[여운홍]]과 함께 [[뉴욕 주|뉴욕]]으로 향했다. 선실에서 김규식은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쉬지않고 타이프를 쳤다 한다.<ref name="in33"/>
== 중국의 산둥 문제 ==
파리 평화 회의에서 중화민국 대표는 서방 열강과 일본이 중국에서 강탈한 제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7개 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ref name="김하룡"/>: (1) 중국에 설치된 세력범위의 포기, (2) 중국에 주둔하는 각국 군대의 철수, (3) 각국이 중국에서 경영하는 우편전보사업의 폐지, (4) 영사재판권의 철회, (5) 조차지의 반환, (6) 조세의 반환, (7) 관세 자주권의 승인.<ref name="김하룡"/> 그리고 여기에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탈취한 각종 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조목이 부가되어 있었다.<ref name="김하룡"/>
== 베트남의 청원 ==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사무국에 베트남의 청년 [[호찌민]]이 찾아왔다.<ref name="전국"/> 그는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등 8개 항으로 이루어진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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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제1차 세계 대전]]
[[분류:우드로 윌슨 행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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