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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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아관파천으로 몸을 피하였고, 이후 외국 열강들의 공관이 가까운 덕수궁에 거처하였다. 황제가 덕수궁에 머물자 주변의 시가지가 정비되었는데, 광화문 네거리에서 덕수궁 대한문까지 큰 도로가 개설되었고, 경성부청 앞에는 큰 광장이 조성되었다. 대한문 앞의 이 광장은 삼일운동을 비롯하여 한국의 현대사의 중요한 무대였다.
 
해방 후에도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집회를 갖았는데가졌는데, 이는 광화문의 [[정부청사]]와 현재 [[서울시의회]]으로 사용하는사용되는 [[국회의사당]], 그리고 [[정동]] [[시립미술관]]에 있던 [[대한민국의 대법원|대법원]]과 매우 가까운 요지였기 때문이다.
 
== 시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