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5번째 줄: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아관파천으로 몸을 피하였고, 이후 외국 열강들의 공관이 가까운 덕수궁에 거처하였다. 황제가 덕수궁에 머물자 주변의 시가지가 정비되었는데, 광화문 네거리에서 덕수궁 대한문까지 큰 도로가 개설되었고, 경성부청 앞에는 큰 광장이 조성되었다. 대한문 앞의 이 광장은 삼일운동을 비롯하여 한국의 현대사의 중요한 무대였다.
해방 후에도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집회를
== 시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