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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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中宗, [[1488년]] [[4월 16일]] ([[음력 3월 5일]]) ~ [[1544년]] [[11월 29일]] ([[음력 11월 15일]]), <small>재위:</small> [[1506년]]~[[1544년]])은 [[조선]]의 제11대 [[왕]]이다. [[휘]]는 역(懌),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자 (이름)|자]]는 낙천(樂天). 사후 시호는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ref>중종(中宗)이라는 말은 연산군으로부터 나라를 구하여 중흥시켰다는 의미로 정해진 것이다. 인종은 '종'(宗) 자로는 부족하다 하여 중조(中祖)를 제안했는데, [[조선 성종|성종]]을 연산군 대신 잇는 왕으로써 '조'(祖)를 붙이는 것은 맞지 않다는 반대를 받아들여 거두었다.</ref>이다. [[조선 성종|성종]]의 차남으로 [[정현왕후]] 소생이다.
 
[[1506년]]부터 [[1544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506년]]부터 이듬해 [[1507년]]까지 [[박원종]](朴元宗)이 [[권력|실권섭정]]하였고 [[1507년]]부터 [[1544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반정으로 집권한 두 번째 군주였다. 그러나 사적인 욕심이나 원한으로 반정을 일으킨 [[세조 찬위]], [[인조반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되나, 전반에는 공신 세력에 의해, 후반에는 외척 세력의 전횡에 휘둘렸다. 하지만, 김안로나 조광조의 숙청 때 중종의 모습은 사관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라고 하거나, ' 이때 양연이 대사헌으로 이 의논(김안로의 처벌)을 먼저 주장한 것은 왕의 밀지(密旨)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라고 했듯이 단순히 신권에 의해 휘둘린 왕은 아니었다. 재위 중반에 [[조광조]] 등의 사림을 일시에 기용하였으나 공훈삭제와 관련한 공신세력들의 반발과 자신의 왕권의 위협에 대해 우려하여 사림 세력들을 기습적으로 숙청한다. 이 후에는 남곤이 정국을 주도하고, 남곤 사후에는 김안로가 주도하지만, 김안로의 지나친 권력쟁투와 횡포로 인해 위협을 느껴 조광조와 마찬가지로 김안로를 기습적으로 제거한다. 이후에는 외척에게 정사를 맡긴다. 이는 후일 [[대윤]], [[소윤]]간의 정쟁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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