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후군 출혈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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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성 출혈열은 19세기 초 [[러시아]]의 [[아무르]] 지역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문헌상으로는 1939년 일본인들이 [[흑룡강]] 유역의 송고 지방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에서 발생한 것을 기록한 것이 최초로 여겨지고 있다.<ref name="동아_1">不請客…반갑잖은疾病들, 《동아일보》, 1963.6.15</ref> 당시 러시아군과 일본군에서는 만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였고, 관동군 [[731부대]]에서는 [[한국인|한국인들]]과 [[중국인|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였다고도 한다.<ref>[http://bric.postech.ac.kr/myboard/read.php?Board=interview&id=94&ksr=1&FindText=%C7%D1%C5%B8%B9%D9%C0%CC%B7%AF%BD%BA 대한학술원 이호왕 회장 (1)] - BRIC이 만난 사람들, BRIC, 2003.9.</ref><ref name="경향_1">韓國人등 3千명 細菌실험 祭物로, 《경향신문》, 1981.5.26</ref> 이 병은 '''코린열''', '''코카열''', '''송고열'''로도 불렸다.<ref name="동아_2">正體不明의 疾病 流行性出血熱, 《동아일보》, 1975.10.24</ref>
 
이 병은 1951년 한국전쟁 중에중에도 다시크게 발견되었다유행하였다. 중부전선에 주둔해 있던 유엔군 장병 3천여 명이 감염되었고, 그중 다수가 사망하였다. 이는 일찌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질병으로 여겨졌고, 감염된 중공군으로부터중국군으로부터 진드기를 매개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ref name="동아_1"/>
 
전쟁 후에는 한동안 잠잠하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다시 발생하였고,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줄어드는 추세를 보인 것으로 보도되었다. 사망률은 가장 높을 때가 20 ~ 30% 였던 것이 8 ~ 10%로 줄어들었다.<ref name="동아_1"/> 하지만, 발생 지역은 점차 번져 1970년대에는 전국으로 확산하게 되었고, 연간 수백 명의 환자가 발생하였다. 1973년 9월까지 유엔군은 2,780여 명, 한국군은 약 2,690여 명, 민간인은 580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였다.<ref name="동아_3">「유행성出血熱」전국이發病圈, 《동아일보》, 1973.9.7</ref> 1980년에는 도시에서도 집쥐에 의해 전염이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ref name="경향_3">유행성 出血熱 都市서도 感染된다, 《경향신문》, 1980.7.11</ref>
 
신증후군 출혈열의 병원체를 발견한 것은 1976년 한국의 [[이호왕]] 박사가 이끄는 [[고려대학교]] 바이러스병연구소 연구진에 의해서였다.<ref name="경향_2">流行性 출혈열 病原體 발견, 《경향신문》, 1976.4.29</ref> 최초의 백신을 개발해 낸 것은 1990년이 되어서였다.<ref name="매경_1">유행성 出血熱 백신 世界 첫 개발, 《매일경제》, 1990.9.21</ref>
 
[[세계보건기구]]는 이 질병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신증후군 출혈열(hemorrhagic fever with renal syndrome)' 이라 명명하였다.<ref name="WHO">{{언어고리|en}} [http://www.who.int/biologicals/vaccines/haemorrhagic_fever/en/ Haemorrhagic fever with renal syndrome], WHO, 2011.11.14</ref> 따라서 공식적인 명칭은 '신증후군 출혈열' 이지만, '유행성 출혈열' 이라는 명칭도 자주 혼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