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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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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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16 Coup Park Chung-hee.jpg|thumb|300px|right|5·16 군사정변 직후, [[5월 16일]] 오전 8~9시 경 중앙청 앞에서 박정희와 이낙선 소령, 박종규 소령]]
'''5·16 군사 정변'''(五一六軍事政變)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군인 계급)|소장]] [[박정희]], [[중령]] [[김종필]], [[소령]] [[이낙선]] 등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8기, 9기 출신 일부 장교들이 [[장면]] 내각의 무능력과 [[사회]]의 혼란을 명분으로이유로 제6군단 포병여단,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 사령부|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해 [[청와대]]를 장악,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다사건이다.
 
== 쿠데타의 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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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저술가 겸 사회운동가 [[정경모]]는 장면 총리의 수녀원 피신을 두고 "도망한 지 5일째에 모습을 나타내어 학생들의 선혈로 얻어진 한국 사상 유일한 민주주의 정권을 너무도 간단히 박정희 앞에 내밀어 그것을 이양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며 "피노체트에게 습격당해도 최후까지 저항하여 기관총을 쏘면서 죽어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에 비해 그 말로가 너무도 교활해 한국인으로써 부끄럽다"<ref>정경모,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192페이지</ref> 라며 [[국무총리|총리]] [[장면]]의 처신을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사회 혼란 수습과 경제 발전이라는 국민들의 열망을 실현시키지 못한 장면 정부로 인해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 당시 한국은 민주주의 보다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였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 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