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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ref name="조갑제318">[[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조선일보사]], 1998) 318~320쪽 참조.</ref>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고령 박씨|고령]](高靈)이며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의 아버지이다.
 
젊은 시절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3년간 교사로 근무했고, 만주군관학교 졸업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여 졸업, 만주 보병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를 지내다 1946년 7월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며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백선엽]] 구명하기도 했지만 그 보다구명과 여순사건과 관련한 남로당 조직에 대하여 모두 누설한 대가로 사건 가담자 중 유일하게 자기만고발함으로써 살아남을사형을 면하게 있었다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2&aid=0000018559 박정희 "사쿠라 같이 훌륭히 죽겠습니다"] 프레시안, 2005년 5월 17일</ref>
 
그렇게이후 동료들을강제 밀고한 대신 사형을 면하고 강제예편된 예편되었다.박정희는 [[한국 전쟁]]이 나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참전하였다.<ref>[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61100009&ctcd=C03 '박정희 공원' 논란 신당동 집 42년 전에 무슨 일이…] 조선일보, 2013년 06월 17일</ref><ref>[http://www.hani.co.kr/section-014001000/2000/014001000200011151711015.html 박정희기념관'을 반대하는 이유] 한겨레, 2000년 11월 15일</ref>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과 의장, 그리고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대통령|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독재 장기집권을 반대하던 야당 및 학생운동 세력 등 민주화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1979년]] 10월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1979년]] [[10월 26일]] 연회를 하던 도중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권총에 살해당했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으로 다양하게 나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는 평가,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다. 반대 측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이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으로 보고 있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0/2009121001803.html 아시아·아프리카 20개국 70명 "한국은 우리가 본받을 모델"]</ref><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1297473&cp=nv "한국 산업 앞선 경험 배우러 왔죠" 왕양 中 광둥성 당 서기 방한]</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152943 오방색 걸친 상처입은 산하 "개발의 잔혹함 그리고 싶었다"]</ref>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평가 등에 대해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141835525&code=210000 "60년 최대 성과는 산업화" 56% 경향신문 2008. 8]</ref><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1016002863&subctg1=&subctg2= 박정희 바로 세우기] 세계일보, 2009년 10월 16일</ref><ref>[http://www.newsva.co.kr/uhtml/read.jsp?idxno=381310&section=S1N54&section2=S2N235 역대 최고 대통령에 박정희 압도적 1위] 아시아경제, 2008년 8월 14일</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