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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몽(崔知夢)는 [[고려 태조|태조]]가 [[후삼국 시대|후삼국]]을 [[통일]] 할것을 예지하였다. [[고려]] 초기 [[전라남도|전남]] [[영암군]](靈巖郡) 출신 관료로 [[고려 태조|태조]]~[[고려 성종|성종]]조의 왕권 안정에 공을 세웠다.
 
[[고려 혜종|혜종]]의 시해 음모를 예측하여 [[고려 혜종|혜종]]을 암살의 위기에서 구했다? 그러나 [[고려 혜종|혜종]] 사후 극심한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과정에서 [[왕건]]의 훈요십조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도 중용되었다. [[고려 혜종|혜종]] 자신의 외가가 공주강 이남 출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주강 이남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훈요십조의 내용의 공개는 아무래도 [[고려 정종 (3대)|정종]] 즉위 후가 되는 것이다. [[최총진|최지몽]]이최지몽이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정종 (3대)|정종]]과 그 추종세력들과 함께해 선왕 [[고려 혜종|혜종]]을 배신하고 그의 세력 기반이 되어 온 공주강 이남 사람들을 축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광종|광종]] 말년에 왕권 강화책에 따라 벼슬에서 퇴출되었다가 [[980년]], [[고려 경종|경종]](景宗) 5년에 내의령(內議令)으로 복직되었다. 지몽은 [[고려 성종|성종]] 6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태자태부로 증직, 시호는 민휴(敏休)을 받았다.
 
==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