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 팔레올로기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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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van III and portrait of Sophia Palaiologina by Viktor Muyzhel.jpg|thumb|left|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의 초상화를 보는 [[이반 3세]].]]
여러 해를 거쳐 소피아는 남편인 이반 3세가 의사결정을 할 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녀는 곧잘 통찰력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었으며,<ref name=madariaga/> 이반 3세가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 소피아는 이반 3세에게 몽골에게 조공을 바치는 굴욕적인 외교를 청산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결국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1480년 몽골에 대한 조공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였다.<ref name=madariaga/> 또한 소피아는 화려했던 과거 비잔티움 제국의 의식과 궁정예법 등을 [[크레믈린]] 궁정에 도입하였으며,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라하였다.
 
소피아는 당시 러시아의 다른 귀족들과 왕실 여성들을 따라 가정생활에만 충실한 전통적인 러시아식 관례를 따를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녀가 서유럽의 왕비들처럼 유럽에서 온 방문사절단을 환영하는 행사를 주관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ref name=madariaga/> 소피아는 임종 직전에 남편에게 마지막 소원으로 손자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이반 3세의 손자)|드미트리]] 대신 아들인 [[바실리 3세|바실리]]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청원하였다. 소피아에게는 바실리 3세 외에도 [[스타리스타의 안드레이]]라는 아들도 낳았는데, 그의 마지막 후손인 [[스타리스타의 마리아]]는 리보니아의 왕 마그누스와 혼인하였으며, 1610년에 사망하였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