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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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국기나라|대한제국}}, {{국기나라|중화민국}}, {{국기나라|영국}}, {{국기나라|대한민국}}
|성별 = 남자
|학력 = [[1913년]] 상하이 오송상선학교 항해학과항해과, 런던 킹에드워드7세 항해대학
|직업 = 독립운동가, 군인, 항해사, 정치인
|종교 = [[대종교]]
|배우자 = 김복희
|자녀 = 아들 신명구, 딸 신내원
|부모 = 아버지 신재록
|친척 =
|별명 = 호 소창(小滄)
|봉급 =
|순자산 =
|서명 =
|웹사이트 =
}}
 
'''신성모'''(申性模,[[1891년]] [[10월 20일]] [[의령군|의령]] ~ [[1960년]] [[5월 29일]]<ref> {{웹 인용 |url= http://gonews.kinds.or.kr/BEFORE_90_IMG/1960/05/30/19600530DAM03.pdf |제목=申性模氏別世 |확인일자= |확인월일= |확인년도= |저자=동아일보 1960년 5월 30일 3면}} </ref>)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191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채호]], [[안희제]]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고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임정 군사위원을 지냈다. [[1945년]] 광복 뒤 대한청년단장,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장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하고 [[1950년]] [[4월 21일]]부터 [[1950년]] [[11월 22일]]까지 [[국무총리|국무총리 서리]]를 지냈다. 본관은 [[고령 신씨|고령]], 호는 소창(小滄)이다.
 
[[신아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의 멤버로 활동하였고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임정 군사위원을 지냈다. 본관은 [[고령 신씨|고령]], 호는 소창(小滄)이다.
 
== 생애 ==
=== 생애 초기 ===
신성모는 [[1891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신재록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호를 소창이라 하였다. [[사간원]][[정언]]을 지낸 정은 신평(靜隱 申枰, 1390~?)의 후손으로,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인 군부인 고령신씨, 암헌 [[신장]](申檣), [[조선 세조|세조]] 때의 문신, 학자 [[신숙주]]는 그의 방계 선조였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측량학]]을 배운 뒤 [[측량기사]]로 전국 각지를 떠돌다가 [[이극로]]활동하였고, [[홍명희]] 등과 만나서 친구가 되었다. [[1907년]]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야간반에 들어갔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측량학]]을 배운 뒤 [[측량기사]]로 전국 각지를 떠돌다가 [[이극로]], [[홍명희]] 등과 만나서 친구가 되었다. [[1907년]]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야간반에 들어갔다.
 
[[1910년]](융희 4년) [[보성전문학교|보성법률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신채호]]와 고향선배인 [[안희제]]의 지도 아래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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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오송 등지 군사시설인 무선전신국에서 활동하였고,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였다. 1919년에 북경에서 김복희와 결혼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일하였다. 같은 해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조선에 대한 미국의 위임통치 청원을 서면 제출한 데 분개하여, [[박용만 (1881년)|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과 함께 [[이승만]] 성토문을 발송하였다. 이후 [[신채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는 운동에 가담하였다.
 
[[1923년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처이던 [[백산상회]]에의 독립 자금 전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1925년1923년]] 석방되자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항해대학<ref> 조준희,〈소창 신성모의 영국생활: 런던 '항해대학'의 실체를 밝히다〉(《해바라기》(2012.3.) 16~18쪽.) </ref>에서 수학, 1등 항해사자격을 얻었다. [[1927년1930년]]에는 [[베를린 대학]]을 졸업한 [[리극로]]와 함께 [[독일]]의 [[라인]] 지방의 공장도시와 [[프랑스]]내 [[제1차 세계 대전]]의 격전지 [[베르덩 요새]], [[파리 시내]] 등을 여행하고,부터 [[영국]] [[런던]]으로 가서 1년간 [[항해대학인도]] 기숙사에서왕래하는 1년간정기화객선의 생활하였다선장이 되었다.
==== 임정 이탈 이후 ====
[[1921년]] 비밀리에 조선으로 들어와 죽마고우인 [[이우식]](李祐植)을 만나 학비 후원자를 소개받기도 했다.
 
[[1940년]] [[9월]] [[한국 광복군]]이 설치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그에게 임정 군사위원직을 특별 임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귀국을 포기하고 한 인도 상선 회사의 고문으로 취임하여 봄베이에서 체류하다가 [[1948년]] [[5월]] 경 그가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다. [[1947년]] [[이극로]]에 의해 [[경향신문]]에 항해대왕으로 소개되었다. [[1948년]] 생존 소식이 알려진 뒤 그해 [[8월]]초 [[동아일보]]에 그의 근황에 대한 기사가 계속 보도되었고, [[1948년]] [[5월]]부터는 그가 [[해군]] 책임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1948년]] [[11월]]에야 배편으로 환국하였다.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처이던 [[백산상회]]에의 독립 자금 전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1925년]] 석방되자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항해대학<ref> 조준희,〈소창 신성모의 영국생활: 런던 '항해대학'의 실체를 밝히다〉(《해바라기》(2012.3.) 16~18쪽.) </ref>에서 수학, 1등 항해사자격을 얻었다. [[1927년]]에는 [[베를린 대학]]을 졸업한 [[리극로]]와 함께 [[독일]]의 [[라인]] 지방의 공장도시와 [[프랑스]]내 [[제1차 세계 대전]]의 격전지 [[베르덩 요새]], [[파리 시내]] 등을 여행하고, [[영국]] [[런던]]으로 가서 1년간 [[항해대학]] 기숙사에서 1년간 생활하였다.
 
[[1930년]]부터 [[영국]] [[런던]]과 [[인도]]를 왕래하는 정기화객선의 선장이 되었다.
 
[[1940년]] [[9월]] [[한국 광복군]]이 설치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그에게 임정 군사위원직을 특별 임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귀국을 포기하고 한 인도 상선 회사의 고문으로 취임하여 봄베이에서 체류하다가 [[1948년]] [[5월]] 경 그가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다. [[1947년]] [[이극로]]에 의해 [[경향신문]]에 항해대왕으로 소개되었다. [[1948년]] 생존 소식이 알려진 뒤 그해 [[8월]]초 [[동아일보]]에 그의 근황에 대한 기사가 계속 보도되었고, [[1948년]] [[5월]]부터는 그가 [[해군]] 책임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1948년]] [[11월]]에야 배편으로 환국하였다.
 
=== 생애 후반 ===
==== 정치 활동 ====
[[파일:이승만 신성모 윤보선.jpg‎|썸네일|200px|[[1949년]] 제31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왼쪽은 [[이승만]], 가운데는 총리 신성모, 오른쪽은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 [[윤보선]]]]
1948년 귀국 직후 1949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결성때 [[대한청년단]]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ref>[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24315&v=42 '대한청년단' - 네이트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이후 [[대한청년단]] 단장과 교통부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1949년]] 제2대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을 거쳐 제2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이승만]]은 [[영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을 우대하였는데,신성모는 런던 유학으로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귀국 즉시 그에게 제독이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당시 그는 [[영국]] 상선의 선장과 인도 상선회사의 고문, 이사 등을 지냈지만 [[중국]]에서의 군사 훈련을 받은 점과 [[중화민국]] [[해군]]제독 살진빙(薩鎭氷)의 부관으로 있었다는 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의 군사위원으로 있었다는 점이 경력으로 인정되어 [[해군]] [[중장]]의 계급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승만이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우대했다고는 하지만 인재선발 방식이 너무 엉망이였다. 단지 선장 한번 한 그 경력으로 신성모가 국방부 장관이 되었기 때문이였다. 이 때문에 신성모는 군복무를 전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신성모의 지휘능력은 형편없었다. 또한 신성모는 매양 이승만에게 울면서 아양을 떨기에만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신성모를 '''낙루 장관(落淚 長官)'''이라 불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7&aid=0000220980 (언중언)눈물 장관]</ref>
 
귀국 즉시 그에게 제독이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당시 그는 [[영국]] 상선의 선장과 인도 상선회사의 고문, 이사 등을 지냈지만 [[중국]]에서의 군사 훈련을 받은 점과 [[중화민국]] [[해군]]제독 살진빙(薩鎭氷)의 부관으로 있었다는 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의 군사위원으로 있었다는 점이 경력으로 인정되어 [[해군]] [[중장]]의 계급이 부여되었고, 그는 신성모 제독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방부 장관 재직 당시인 [[1949년]] [[7월 17일]] [[대한청년단]] 훈련장에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 발언이 문제가 되자 자신의 발언이 오해되었다고 해명했지만, 그 해 9월초에도 "때 오기만 기다릴 뿐이고 밀고 갈 준비는 이미 됐다"고 주장했다. <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년) 25쪽.</ref>
 
==== 한국 전쟁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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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장경근 신성모 정일권.png|thumb|해군본부에서 3군합동작전협의를 마치고 나란히 선 장경근 국방부 차관, 신성모 국방부 장관, 정일권 소장 (왼쪽부터). 정일권은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발령을 받은 얼마후였다.]]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를 사퇴하고 [[이윤영 (1890년)|이윤영]]이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서리]] 인준부결<ref>이재원, 《한국의 국무총리 연구》 (나남, 2006) 109페이지</ref>되면서 그는 [[1950년]] [[4월 21일]]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하여 [[11월 22일]]까지 근무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개전 초기 그는 [[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전황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발언했다. <ref> 전쟁기념사업회, 《한국전쟁사 3권》(행림출판, 1992) 39쪽. </ref>
[[1951년]]에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둘러싸고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김종원 (1922년)|김종원]](金宗元)과 함께 사건을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국회의 비난을 받았고, 그런 와중에 세칭 [[국민방위군사건]]이 발생하여 국회가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조사한 결과 착복금 중 일부가 이승만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신성모는 이를 무마하려다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1951년]] 주일대표부 제5대 주일본 수석공사로공사로 근무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었지만 [[이범석 (1900년)|이범석]], [[지청천]], [[김홍일 (1898년)|김홍일]] 등과 달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한 실전경험이 없었고, 환국 이전까지 해양선박 관련 업무와 통신관련, 통역관련 일에 종사하였으므로 군사 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다.
 
게다가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시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게 했으나 정작 이 사건으로 많은 인명피해와 포로가 발생하자 신성모는 모든 책임을 그의 명령에 의해 움직였을 뿐인 최창식 대령에게 뒤집어씌우고 면피용으로 최창식 대령을 작전비행죄(作戰非行罪) 혐의로 총살시켰다.<ref>[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31667 정순태(鄭淳台)의 6·25 남침(南侵)전쟁이야기(7)/ ‘한강대교 폭파’는 국군의 실책(失策)]</ref>
 
[[1951년]]에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둘러싸고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김종원 (1922년)|김종원]](金宗元)과 함께 사건을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국회의 비난을 받았고, 그런 와중에 세칭 [[국민방위군사건]]이 발생하여 국회가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조사한 결과 착복금 중 일부가 이승만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신성모는 이를 무마하려다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1951년]] 제5대 주일본 수석공사로 근무하였다.
 
이때 그의 일본 공사관 부임을 놓고 내무장관 [[조병옥]], 총리 [[장면]] 등이 반대했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윤보선]] 역시 [[국민 방위군]]사건과 [[거창 사건]]을 두고 그의 도덕성을 언급하며 반대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들의 반발을 무릎쓰고 신성모의 일본공사직을 관철시켰다.
 
=== 휴전 이후 ===
[[1956년]] [[11월 28일]]부터 [[한국해양대학교|해양대학장]]을 역임하다가 <ref> 김종길,〈해양대학 신성모 학장〉(《해양한국》(2000.7.) 150~151쪽.) </ref> 병을 얻어 와병하던 중, [[1960년]] [[5월 29일]]에 [[의령]]에서 [[뇌출혈]]로 죽었다타계하였다.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선영에 묻혔다가 뒤에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2009년]] 한국해양학회에서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헌정하고<ref>[http://www.fnnews.com/view?ra=Sent1201m_View&corp=fnnews&arcid=0921588950&cDateYear=2009&cDateMonth=03&cDateDay=08 First-Class경제신문 파이낸셜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 name=autogenerated2>[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30642311&type=&nid=&sid=0106&page=1 고 신성모 전 국무총리 서리 흉상, 해기사 명예전당에 헌정<!-- 봇이 따온 제목 -->]</ref> 흉상을 제막했다.<ref name=autogenerated2 />
 
== 가족 ==
* 아버지 신재록
* 부인 김복희
** 아들 신명구
** 딸 신내원
 
== 신성모를 연기한 배우들 ==
줄 103 ⟶ 66:
* [[신채호]]
* [[안희제]]
* [[정화암]]
* [[이범석 (1900년)|이범석]]
* [[이승만]]
줄 133 ⟶ 95:
* [[안재홍]]
* [[여운홍]]
* [[이기붕]]
* [[프란체스카 도너]]
* [[최기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