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상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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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8월에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였다. 이에 봉상왕은 신성으로 대피하려 하였으나 적이 추격해 왔다. 이때 신성의 재(宰)인 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모용외의 군을 만나 격파하였다. 봉상왕은 고노자를 대형(大兄)으로 삼고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주었다. [[296년]] 음력 8월 [[모용외]]가 다시 침입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돌아갔다.
 
[[294년]]에는 국상 상루(尙婁)가 죽어 남부의 대사자(大使者) [[창조리]](倉助利)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296년]], [[모용외]]가 물러간 후 고노자를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태수]]로 삼아 [[모용외]]를 방비하게 하였다.
 
[[298년]] 음력 9월에 흉년이 들었으나 궁궐을 증축하는 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살피지 않았다. [[300년]]에도 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궁궐을 증축하니 백성들이 흩어졌다. 이에 국상 [[창조리]]가 왕에게 백성을 돌볼 것을 간언하였으나 봉상왕은 오히려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봉상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자결하였다. 봉상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봉상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