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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매일신보에 그의 이름으로 사설 실린것이 마지막글로 그 이후부터 장지연은 병으로 요양하던 중 1919년 4월 [[경남]] [[양산]]을 유람했다. 1921년 1월에 병을 얻었으나 회복되지 않고 더욱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 치료했지만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
 
==친일 행적 의혹 논란==|제목=친일인사 ‘장지연의 비극’ 거듭되는가?
[[경술국치]] 이후 장지연은 이 [[황현]]의 절명시 필화 사건 이후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시<ref>{{뉴스 인용
|url=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6/005000000200506020643267.html
|제목=위암 장지연 친일시 공개
|작성일자=2005-06-02
|확인일자=2008-05-14
|저자=이순혁
|출판사=한겨레
}}</ref>와 [[매일신보]]에 논설 주필로 있었고 730여편을 기고했다고 한다. 매일신보 기고 활동은 [[1914년]] 말부터 [[1918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빌려 조선인은 단결성이 없는 인종이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5798.html
|제목=친일인사 ‘장지연의 비극’ 거듭되는가
|작성일자=2008-06-27
|확인일자=2008-07-01
|저자=강명관
|출판사=한겨레
}}</ref> 장지연이 이러한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은 [[일제강점기]] [[경남일보]]사의 내부분열로 신문사를 퇴사한 이후 조선총독부 인사인 아베 미쓰이에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보는 그 당시에도 유림,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 장지연 본인은 "1. 객원으로 대하고 사원으로 대하지 않는다. 2. 작성 원고는 일사, 유사, 종교 풍속 등의 내용에 한정하고 신문사 안이 아닌 밖에서 작성해 보낸다. 3. 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자신도 신문사 활동을 마친다."는 등 세 가지 조건에 입각해 [[매일신보]]에서 활동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 매일신보에 발표된 그의 논설글이나 작품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적인 언설들이 상당수 존재한다.<ref>《한국사 시민강좌》-2010년, 제47집-, [[일조각]], p265 참조.</ref>
 
==사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