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가멜라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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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를 침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이기고 2년동안 [[이집트]]와 [[지중해]] 연안을 정복하였다. 시리아에서부터 페르시아의 본토로 진격한 알렉산드로스는 별다른 저항없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건너 진격해 들어갔고 페르시아는 이에 맞서 대군을 모아 [[마케도니아 왕국|마케도니아]]군의 진로를 막고 포진했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오늘날 [[이라크]]의 [[모술]] 근처의 가우가멜라 평원으로 [[다리우스 3세]]는 상대적으로 병력이 열세인 마케도니아군을 맞아 자신의 대군을 이끌며 효과적으로 진을 펼칠 수 있도록 넓고 평탄한 평지를 전투장소로 정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가우가멜라''는 "낙타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양쪽 군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고대의 기록과 현대의 연구자들의 추정치가 서로 다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병력 기록은 동시대인인이자 직접 참전한 프톨레미아오스의 기록에 의하기 때문에 비교적 공정하고 정확하다고 할 수 있으나 페르시아 병력의 경우 고대의 기록이 훨씬 과장되어있을 가능성이 많다.
 
고대의 페르시아 병력에 대한 기술은 기병 40,000~200,000, 보병 800,000~ 1,000,000으로 총병력이 100만을 상회하지만 이는 당시의 인구 통계나 자료로 비추어 타당하지 않다. 현대의 연구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의 경우 전차 200대, 경보병 62,000명, 그리스 [[중장보병]] 2,000명, 기병 12,000, 전투 코끼리 15마리 등으로 총 90,000~100,000 정도의 병력이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에 맞서 마케도니아 측은 경보병 9,000명, 중장보병 31,000명, 기병 7,000으로 수적으로 훨씬 열세였으나 장비와 훈련정도는 페르시아를 압도했을 것으로 본다.
 
양쪽 군대가 평원에 맞서 진을 펼치고 맞선 전투 전날밤, 페르시아군은 진지에서 밤새 무장한 채로 서있었으나 알렉산드로스군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식량도 충분히 지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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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ttle_of_Gaugamela,_331_BC_-_Opening_movements.gif|thumb|250px|left|가우가멜라 전투의 시작]]
=== 진영 배치 ===
다리우스는 동방과 동맹 [[스키타이]] 부족들에게서 우수한 기병을 모으고 [[전차 (고대 무기)|전차]] 200대와 [[인도]]의 [[전투 코끼리]] 15마리도 포진시켰는데 코끼리는 전투에서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는 전차의 원할한 기동을 위하여 평원의 잡목과 풀들을 모두 베어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다리우스 자신은 최정예 보병대와 전통적으로 페르시아 군주들과 함께 좌우로 기병과 그리스 용병의 호위를 받으며 중앙에 포진했다. 진영 중앙에는 보병대와 [[불사부대]], 궁수를 배치했고 전체 부대의 좌익과 우익에는 각각 기병을 포진하고 전차를 기병대의 선두로 좌우에 배치했다.
 
마케도니아 군은 중앙에 [[팔랑크스]], 중장보병을 중심으로 두고 좌우익에 기병을 배치했는데 오른쪽에는 알렉산드로스 자신이 직접 최정예 [[컴패니온 기병대]]와 파이오니아, 마케도니아 경기병을 지휘하고 왼쪽날개에는 [[파르메니온]]이 [[테살리아]]와 그리스 용병, [[트라키아]] 기병대를 지휘했다. 중앙의 팔랑크스는 이중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 대항하여 좌우익의 균열이 생길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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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익의 붕괴 ===
한편, 알렉산드로스가 본격적으로 다리우스를 추격해 들어가려는 찰나, 마케도니아군 좌측의 [[파르메니온]]으로부터 다급한 전갈을 받았다. 파르메니온이 이끄는 좌익은 마자에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기병대로부터 돌파당했고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둘로 갈라져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기의 부대를 지키느냐 다리우스를 잡느냐의 선택을 해야했고 결국 추격을 포기하고 파르미니온을 돕기 위해 돌아섰다.
 
마자에우스의 페르시아와 인도 기병대는 마케도니아의 전선을 뚫고 들어와 마케도니아의 보병을 공격하는 대신 후방에 잡혀있는 다리우스의 가족을 먼저 구하러 했다. 페르시아 기병대는 알렉산드로스의 캠프까지 내려와 다리우스의 어머니인 [[시시감비스]]를 구하려 했으나 그녀가 거부하였다고 한다.<ref>W.W.탄, 지동식 역 《알렉산더大王史》삼성미술문화재단, 중판, (1988), 84쪽 </ref> 파르미니온을 구하러 달려오는 도중 알렉산드로스는 퇴각하는 페르시아 기병대로부터 타격을 입었다. 마자에우스는 다리우스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부대를 퇴각시키려 하였지만 페르시아군은 혼돈에 빠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파르메니온은 전세를 회복하여 역전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다리우스에 대한 총추격을 명령하였고 해질 때까지 쉬지도 않고 다리우스를 추격하였다.
 
== 전투의 결과 ==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전리품을 파르미니온에게 맡기고 쉬지 않고 다리우스를 추격했으나 결국 붙잡는 데 실패했다. 다리우스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동쪽으로 밀려나 거기서 다시 군대를 규합해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려 했으나 페르시아 동방 속주의 총독들은 다리우스를 따르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별다른 저항 없이 [[바빌론]]으로 입성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샤(''왕중의 왕'')로 군림했으며, 결국 다리우스는 박트리아까지 쫓기고 결국 부하 총독인 [[베수스]]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아케메네스 왕조와 페르시아 제국은 결국 무너졌다.
== 망치와 모루 ==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즐겨 사용하던 전술 이수스전투와 가우가멜라전투 당시 페르시아군을 격퇴하는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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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페르시아의 역사]]
[[분류: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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