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틴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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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장소는 현재의 [[이스라엘]] [[갈릴리]]의 [[티베리아스]] 근처로 티베리아스와 [[아크레]]의 중간에 "하틴의 뿔"로 불리는 두 개의 산 중간의 지역이다.
 
== 배경 ==
[[1186년]] 어린 소년 왕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가 죽자 합법적인 계승자가 된 보두앵의 어머니 [[예루살렘의 시빌라]]는 남편 [[뤼지냥의 기]]를 공동 왕으로 앉혔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시빌라와 기,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의 "궁정파"와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이끄는 "귀족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양측의 긴장은 고조되어 거의 전면전으로까지 벌어지기 직전이었는데 [[이벨린의 발리앙]]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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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레몽과 화해하고 아크레에서 레몽의 군대와 힘을 합쳐 살라흐 앗 딘의 군대와 맞서 싸우려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 전투경과 ==
기는 트리폴리의 레몽과 화해하고 [[아크레]]에서 군대를 합쳐 공동으로 살리흐 앗 딘의 위협에 대처하기로 했다. [[1187년]] 7월 십자군은 이 [[갈릴리]] 남단의 세포리스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을 세포리스에서 유인하기 위해 친히 일부 병력을 이끌고 북쪽의 레몽의 요새인 티베리아스를 공격했고 주력 부대는 남겨두었다. 티베리아스는 살라흐 앗 딘을 맞아 공물을 바치고 공성전을 피하려했으나 살라딘은 거부했고 7월 2일 도시를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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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새벽 이슬람군은 연기를 피워 십자군의 시야를 가렸고 밤새 보강된 병력으로 십자군을 포위했다. 십자군은 전 날의 행군과 밤새 물을 구하지 못해 심한 갈증으로 고통을 겪었고 허둥지둥 전선을 갖추고 이슬람군의 공격을 대비하려 했고 완전히 포위당한 것을 알자 막사를 거두고 근처의 우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이슬람군은 십자군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고 십자군은 갈증과 공황에 빠져 거의 몰살당했다.
 
== 결과 ==
대부분의 십자군 기사와 보병은 전투 중에 죽었고 기와 [[샤티용의 레날드|레날드]] 등 많은 십자군 장군들이 포로로 잡혔다. 레몽과 발리앙은 겨우 살아서 도망쳤다. 살라흐 앗 딘은 막사에 끌려온 기에게 얼음물을 주면서 환대했다고 전해진다. 샤티용의 레날드는 살라딘과의 맹세를 깨버린 벌로 살라흐 앗 딘이 직접 목을 잘라 처형했고 예루살렘의 왕 기는 포로로 [[성십자가]]와 함께 [[다마스쿠스]]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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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 FA|he}}
 
[[분류:1187년]]
[[분류:십자군의 전투]]
[[분류:제3차 십자군]]
 
{{Link FA|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