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폭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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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폭격 사건'''은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 전선]](공화군)의 세력권에 있던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 (도시)|게르니카]]가 나치 독일 [[콘도르 사단]] 폭격부대의 폭격을 받은 사건으로, 도시 인구의 1/3에 달하는 1654명의 사망자, 88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참사였다. 이 폭격 사건의 주된 목적은 독일의 폭탄과 전투기의 성능 시험 및 다리의 파괴로, 이 비극에 분노한 피카소가 대작 《[[게르니카 (그림)|게르니카]]》를 그렸다.
 
== 게르니카 ==
[[Image파일:Localización de la CA de Euskadi (NUTS ES1).png|right|thumb|150px|바스크 지방 지도]]
게르니카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있는 마을로서 [[1983년]] 이후로 게르니카-루모로 통칭되고 있다. 악명 높은 비행 폭격 사고를 겪은 뒤에 그 참상을 다룬 곳으로 가장 주목받는 곳 중 하나이다. 오래전부터 게르니카는 [[참나무]]의 고장으로 불렸으며 전쟁 중에 오래전부터 보존되던 거목이 파괴되는 사건이 나기도 했다.
 
=== 군사상황 ===
[[스페인 제2공화국]]에 대항하여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스트 국민군이 반란일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스크 정부는 바스크 민족주의로 인해 따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단독 군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당 세력과 공화당 세력 간 다툼이 가장 큰 도시인 빌바오를 중심으로 산재하고 있었다. 빌바오는 당시 스페인 북부의 전쟁 발발 기운을 가져올 위험이 있었으므로 비스케이 만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위기감은 이미 고조되고 있었다.
 
[[나치 독일]]이 프랑코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콘도르 사단]]의 공격으로 게르니카는 전쟁의 상흔을 직격탄으로 겪어야 했으며 동쪽 바로 앞에서부터 23개의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2개의 육군 대대가 있었지만 바스크 내에는 훈련된 공군이 없었다. 그러나 공화당 측에도 공군이 없었으므로 독일 나치 군병력이 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기습공격 ==
콘도르 사단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국민당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나치 독일]]이 특별히 선발한 집단이었으며 독일은 스페인이 아닌 자국이 군단의 직접 명령권을 갖도록 했다.<ref>Telegram for the CO of Legion Condor Maier: Guernica 26.4.1937. Die deutsche Intervention in Spanien und der "Fall Guernica", Freiburg 1977, Appendix 6.</ref>
 
=== 수행계획 ===
게르니카 사건에 대해서 대중의 궁금증은 여러모로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1970년대에 이르러 직접 폭격 사건 및 학살에 참가한 수행자 혹은 참가자들의 기록이 공개되면서 대중에 알려지게 됐다. 기록은 게르니카 공격이 국민당 세력의 공격에 전폭적으로 가담하려 했으며 이미 계획 단계서부터 나치 병력을 엄호하는 25개의 사단으로 구성됐음을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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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도르니에사가 개발한 Dornier Do 17, 하인켈 111 2기, 융커스 3발 단엽기(Junkers Ju 52) 18기 등의 무기가 동원됐다. 대개 250kg의 고성능 폭발물, 50kg의 경비행기용 폭발물, 1kg의 소이탄 등이 탑재됐다. 총 24개의 폭격기가 게르니카 상공에 출현했으며 총 폭발물은 24톤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 진격군 ===
1차 진격군은 1630시간 동안 게르니카 인근을 정찰했다. 도르니에 17은 남쪽에서 출현하여 약 12개의 50kg짜리 폭탄을 투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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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공격 때 하인켈 기가 코라도 리시의 지휘 아래 나타났다. 이탈리아 공군의 레지나 아에로노띠까 5기가 뒤를 따랐다.
 
=== 연속 공격 ===
[[4월 26일]] 정오 즈음, 콘도르 사단의 유 52기들이 게르니카 지방 공격을 수행했다. 이후에 잠시 착륙하여 신무기를 장착한 뒤 폭격을 강화하기 위해 이륙했다. 북에서 남쪽 방향으로 향하면서 [[비스케이 만]]까지 정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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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의 폭격 중대가 1803~1845 방향으로 출현했으며 150m 정도 앞에서 공격 구도를 이어갔다. 동시에 15분 후에 폭발 진격군이 출현하여 하인켈 51기 두 기가 나타나면서 시민들의 피해가 속출했다.
 
=== 결과 ===
[[Image파일:Luftwaffe 1kg Incendiary Bomb.jpg|right|thumb|150px|1936년 독일공군의 1kg급 폭탄]]
폭격 공격으로 게르니카 일대 대다수가 엄청난 공황 사태에 빠졌으며 전체 건물의 4분의 3 정도가 파괴되어 피해를 입었다. 주요 무기고였던 운세타 사와 타예레스 데 게르니카, 공화당의 주청사였던 카사 데 준타스 등도 파괴됐다.
 
하지만 공격군이 목표했던 다리 파괴는 거의 이뤄지지 않아 사실상 그 목표가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건물 파괴로 수많은 파편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공화당 관련 군의 움직임은 절대적인 어려움에 빠졌다.
 
== 사상자 ==
시민 사상자 수는 자료에 따라 천차만별이기에 현재도 논란 대상이다. 국민당 계열의 군이 3일 후 다시 게르니카에 진격했지만 사상자 수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바스크 정부는 당시 전체 사망자가 1,654명, 부상자는 889명인 것으로 발표했다. <ref>Gérard Brey, [http://www.sbhac.net/Republica/TextosIm/Guernica/Guernica.htm La destrucción de Guernica] 허버트 사우스워스의 ''La destrucción de Guernica 게르니카 공격'' 부분에 해당(Ruedo Ibérico, Paris, 1975).</ref> 이 수치는 스페인 내전과 게르니카 학살을 다룬 문학 작품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민족주의자 측에서는 공화주의자들이 게르니카를 떠나면서 방화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 잘못된 설명을 늘어놓기도 했으며 실지로 국민당 측은 실제적으로 피해 상황 수습에 나서지 못했다는 평을 받는다. 한편 프랑코의 어용지였던 아리바 신문에서는 [[1970년]] [[1월 30일]] 게르니카 폭격 사건의 희생자가 12명에 불과했다는 얼토당토한 발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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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니카 (도시)]]
 
== 주석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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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스페인 내전]]
[[분류:학살]]
{{Link FA|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