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살루스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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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결과 ==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결전, 테살리아의 한 평원에서 일어난 파르살루스 전투의 결과는 카이사르의 압승이었다. 카이사르 쪽의 전사자는 200명뿐이었으나 폼페이우스 쪽은 15,000명 또는 6,000이 전사하고<ref>카이사르의 내전기에는 폼페이우스군 전사자가 15000명으로 적혀있고, 아시니우스 폴리오의 기록을 인용한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6000명이 전사했다고 적혀있다.</ref> 뒤에 남아있던 24,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폼페이우스군의 지휘관 전사자는 폼페이우스군 좌익 사령관이고 카이사르 기병에게 최후를 맞은 에노발부스가 있었고<ref>내전기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도주하다가 과로하여 쓰러졌다가 카이사르 기병에게 추격당해 죽었다.</ref>,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카이사르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티투스 라비에누스|라비에누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메텔루스 스키피오]], 아프라니우스, 페트레이우스를 비롯한 폼페이우스의 대부분의 장군들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고 [[키케로]]와 [[카토 (소)|카토]]는 디라키움에 남아있었다. 반면 [[마르쿠스 브루투스]]나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은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에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그들은 훗날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가 되었다. 한편 폼페이우스의 근거지였던 동방일대는 일제히 카이사르에게 돌아섰다. 따라서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세력권인 시리아에서 재기할 수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추격을 받으며 그리스를 횡단하여 동맹국인 이집트로 도망쳤고 [[에게해]]를 거쳐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했고 거기서 배신당해 죽고 말았다. 이로써 카이사르은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가 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