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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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끝까지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승만은 신익희의 건의가 끝나자 벌떡 일어서 방안을 빙빙 돌면서 손을 입에 갖다 대고는 훅훅 불면서 "안 돼요,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장|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 해공은 모르시는 말씀이야."라고 하였다.<ref name="shinchang381"/> [[신익희]]는 "우남 대통령 저 어른 큰일났다. 아직도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에서 노무자로 이민간 무식한 교포들과 비서 몇 사람 데리고 일하시던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앞으로 정형(情形)은 어려워 질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ref name="shinchang381"/> [[신익희]]는 그가 독립운동 할 당시의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다고 하였다.
 
=== '박사'리고라고 하기에는 떨어지는 지적수준 ===
이승만이 미국 선교사들에게 자신이 조선인 선교사가 되겠다는 각서를 쓰고 미국으로 유학가서 1905년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특별편입한 후 졸업했다. 이후 이승만은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 1907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학업성적 부족'''사유로 낙제를 당하는 바람에 석사 학위 취득에 실패했다. 자세한 과목을 보자면 '''역사학은 C학점'''을 맞았으며 '''경제학은 D학점'''을 맞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싶어서 석사학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1908년에 프린스턴 대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승만이 이렇게까지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이유는 당시 현지출신 개신교 선교사가 매우 부족했으며 특히 '''조선인 출신 개신교 선교사는 아직 배출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였다.<ref>가톨릭의 경우는 과거 가톨릭이 탄압을 받을때 이미 [[김대건]]이 서구계 출신이 아닌 조선 현지 출신 신부였다.</ref> 프린스턴 대학 측에서는 박사학위는 물론이고 그 학위를 2년 이내에 취득시켜주겠다는 매우 파격적인 제안을 하며 이승만을 대학원생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당하게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던 다른 학생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이승만은 모교인 하버드 대학교에 '박사학위를 취득해야겠으니 석사학위를 내놓아라.'라는 황당한 편지를 보냈다. 이에 하버드 대학은 거절해야 하지만 최초의 조선인 출신 선교사를 자기들의 학교에서 배출했다는 기록을 만들기 위해 '계절학기 한과목만 들으면 석사학위를 주겠다'고 답변을 보냈다. 이에 이승만은 하버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을 오가면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동시에 이수했으며 1910년 이승만은 석사와 박사 학위를 같은 날 수여했다.<ref>[http://www.youtube.com/watch?v=idbhQx10-9A (백년전쟁 Part 1) 두 얼굴의 이승만- 권해효 나레이션(풀버전)]</ref> 이는 [[주진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 학교 교수와 [[서중석]] [[셩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등 여러 역사전문가들이 해당 링크에서 밝힌 내용이다.
 
물론 이승만은 당대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머리가 명석한 편에 속하며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한 편에 속한 것은 맞지만 그의 지적수준이 박사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측근들의 부패와 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