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 (155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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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裵楔, [[1551년]] ~ [[1599년]])은 [[조선]]의 무관이다. 유문으로 한편의 시 '월파정' 칠펀량 해전의 대표적인 패장으로 약 5.000병사와 전함 50여척을 잃은 후 한편의 사와 가훈으로 동서화합이 만복의 근원이란 구절을 남겼다.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배설))
 
 
이 시조에 관한 진 동혁 교수의 해설을 들어 본다.
“ 배설은 노래한다. 한때 웅천해전에서 왜선 600여 척을 섬멸하였던 맹장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칠천포(자저 주) 해전에서는 적에게 참패를 당했다. 긴 물속 생활로 온몸은 병이 들었고, 패전의 치욕으로 마음도 스산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ㅡ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ㅡ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絶命詩)
 
정명가도,
임진 왜란을 일으켜 30만 대군을 투입하고도 선조의 줄행랑으로 항복을 받지 못했으나 선조의 두 왕자를 생포했고
조선의 백성들의 저항으로 백성들의 목숨으로 조선은 지켜 졎다.
 
칠천량 해전으로 일본은 정유재란의 침략군들이 바다에서 수장 될 뻔했고, 침략군의 해상 포위망에서 교전을 통해 배설은 부대 단위로 퇴각해서 부하들을 살리고 나라를 살린 유일한 장군이였다.
 
조조가 벽벽대전에서 포위망에 혼자 살아 남았다면 배설은 적들의 포위망을 깨부수고 살아 나왔다.
 
구국의 일념으로 적들의 포위망을 혼심의 힘으로 조선백성의 피와 땀으로 만든 전함을 구해내고 모든 포탄을 적에게 퍼붙고 빈배로 돌아오니 였바꿔 먹으려고 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동인들의 음모로 울똘목에서 왜군을 대파하려든 배설은 꿈을 접고 대역죄인 백의 종군 이순신에게 군권을 이양하고 귀향길에서도 장군다운 기량으로 시마즈 요시로의 목에 장군도를 겨누어 철군요청을 이끌어 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하여금 조선출병의 거부하게 한 직접적인 동기가 "조선수군으로 부산상륙전에 전멸 할 수도 있다는 칠천량해전'명분없는 출병을 저지하기 위해 단기필마로 시마즈 요시라의 적진을 기습하여 살해하지 않고 풍신수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의 절명을 불러 온 명장 배설은 승리만 한 것이 아니라 칠천량 해전의 패배를 인정하고, 침략 살육군을 방어하기 위해 울똘목으로 장장 430km를 증기기관이 아닌 12척의 전함을 노를 저어 7일만에 노량포에 도달시키므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작전을 감행했다.
 
== 주요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