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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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향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기 위해서 정면 충돌보다는 매복·기습·위장 등과 같은 유격 전술을 많이 써서 적에게 큰 괴로움을 주었다. 의병은 각처에서 일어나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우나, 그중에서도 많은 전과를 거두고 명성을 떨친 사람은 평안도의 [[조호익]](曺好益)·[[양덕록]](楊德祿)·[[서산대사]],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경기도의 [[김천일]](金天鎰)·[[심대]](沈岱)·[[홍계남]](洪季男),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고령의 [[김면]](金沔),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영천의 [[권응수]](權應銖), 충청도의 [[조헌]](趙憲),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 황해도의 [[이정암]](李廷馣), 강원도의 [[사명당]] 등이다.
 
지역적으로 남부 지방에서 의병 투쟁이 활발하였던 것은 아무래도 전쟁기간동안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자기의 고향, 사는 터전을 되찾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충의를 강조하였던 유학이 발달하였슴이발달하였음이 의병활동의 근간이 되기는 했으나, 그 이유 하나로만 남부지방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근거로 설명하려는 견해도 있는데, 조선 초기에 퇴계 [[이 황]]의 영남학파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율곡 [[이 이]]의 기호학파의 근거지인 경기, 충청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이 경상도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적었던 원인을 생각해 본다면, 아무래도 적이 점령하였던 기간이 경상도 지역에 비해 많이 짧았던 탓을 크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는 터전을 점령했기에 궐기하여 쫓아내기 위해 힘을 다했지만, 적에 비해 열세인 인원과 무기 등으로 지형지물 등 지리적인 잇점이 없는 타지역에서까지 전쟁을 수행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관군은 전쟁을 주업무로 운용되는 상비군이지만 의병은 전쟁이 끝나거나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황폐해진 마을을 복구하고 흩어진 가족과 친지들을 찾아모아서 삶의 터전을 되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 전체가 총퇴각하기 전까지 왜성을 쌓고 점령했던 사천, 마산, 거제, 부산 등 경상도 지역은 의병활동이 격렬할 수 밖에 없었다. 비슷한 이유로, 곡창지대이자 유학을 공부한 많은 양반들이 살았던 전라도 지역은 전쟁기간 내내 [[삼도수군통제사]]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정점으로 관군들이 내륙의 전주 근방 등 일부지역 외에는 왜군의 침공을 버텨내었기에, 경상도 지역에 비하여 의병활동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일본군에 대한 반격 작전은 한층 강화되어,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 등을 정리하여 관군에 편입시켜 지형지물을 이용한 작전 등 관군의 전투 능력을 강화시켜 의병들은 한층 조직성을 띠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