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탄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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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예상대로 일본군은 1941년 12월 8일 필리핀에 상륙하였으며, 4개 방면에서 미-필리핀군을 압박하며 필리핀을 완전히 점령하고자 했다.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 전역#무지개 계획 (Plan Rainbow)|무지개 계획 (Plan Rainbow)]]를 고안했는데, 해안에서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방어함으로써 가능한 한 장시간 루존 섬을 2개 부대(북부 루존부대 지휘관: [[조나단 메이하우 웨인라이트 4세]] 중장, 남부 루존부대 지휘관: [[조지 M. 파커]] 중장)로 방어하고, 여의치 않으면 기존의 계획이던 War Plan Orange-3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즉, 최대한 비밀스럽고 빠르게 바탄 반도로 철수하여, 마닐라만을 결사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원래의 War Plan Orange-3계획에 따르면 농성을 위한 최소 6개월치의 식량과 의약품 및 무기를 비축하도록 되어있었으나, 맥아더의 수정된 계획 War Plan Rainbow 5에 따라 해안선에서의 방어를 위해 물자들이 해안선 주변으로 넓게 퍼져 있었다. 따라서 바탄 반도에서의 농성을 위해서 비축하려 했던 6개월치의 보급품은 확보하지 못한채 바탄반도로의 철수가 이루어졌으며, 결국 이 보급품의 부족은 바탄 반도에 농성중인 미군의 발목을 잡게된다. '''일본군이 미-필리핀군의 바탄 반도로의 철수를 예측하지 못한 이유'''는, 미-필리핀군이 마닐라를 결사 항전의 의지로써 사수할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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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조직적인 포격과 돌파 전술로 총공세를 시작한 일본군의 기세 앞에 미-필리핀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4월 9일 투항한 미-필리핀군과 생포된 패잔병을 포함한 약 75,000명의 병사들이 포로로써 바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약 10,000명의 병사와 20,000명의 병사가 죽거나 다쳤다.
 
 
== 결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