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만종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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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시칠리아 시민들의 자유민 지위를 거절하자, 시민들은 만프레디의 딸이자 프리드리히 2세의 후계자인 [[아라곤 연합 왕국|아라곤]] 왕비 [[콘스탄체 (아라곤 왕비)|콘스탄체]], 그리고 국왕 [[페드로 3세]]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페드로 3세는 이를 받아들여 콘스탄체와 함께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다.
 
반란 직전 페드로 3세는 대규모 함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교황이 함대의 목적을 묻자 페드로는 아라곤의 교역을 방해하는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시칠리아인들이 왕위를 제안했을때제안했을 때 페드로와 그의 함대는 편리하게도 시칠리아 섬에서 300km 떨어진 [[튀니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페드로는 교황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왕위에 관심이 없는 척 했으나, 며칠 후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향했다. 페드로는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하여 9월 2일 [[팔레르모]]에 입성했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페드로에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자유민의 지위를 바랐던 시민들에게 페드로의 즉위는 외국인 왕이 다른 외국인 왕으로 바뀐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페드로가 옛날 노르만 왕인 [[굴리엘모 2세]]가 주었던 것과 같은 특권을 시민들에게 약속함에 따라, 시민들은 페드로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페드로는 9월 4일 팔레르모 성당에서 시칠리아의 페드로 1세로 즉위했다.<ref>Runciman, Sicilian Vespers, p. 228.</ref>
 
한편 교황 마르티노 4세의 축복 하에 카를로 1세는 왕위를 회복하기 위해 나폴리에서 함대를 보내 메시나 항을 봉쇄했다. 그러나 카를로의 군대는 페드로가 이끄는 아라곤 군의 습격을 받아 시칠리아를 포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