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업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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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서소문]] 앞의 내리막길에 왔을 때, 포졸들은 갑자기 발받침대를 치워 버렸고, 달구지꾼들은 소들이 곧바로 내리뛰도록 다그쳤다. 길은 거칠은 자갈밭이었으므로, 달구지가 덜컹거리며 팔과 머리카락이 십자가에 묶인 죄수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야기했다. 그 내리막길 밑에 사형장이 있었다. 포졸들은 죄수들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그들의 옷을 벗겼다. [[망나니]]들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들보]]에 묶은 뒤 그들의 목을 베었다.}}
 
십수세기 전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와 같은 시간인 오후 세 시에, 아홉명의 순교자가 영관을 썼다. 형법에[[형법]]에 따라서 [[시신]]들은 사흘간 사형장에 방치되었다.
 
당시를 기록한 형조 문서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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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베르]] [[주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인용문2|4월 27일의 새벽에 우리는 가까스로 시신들을 되찾았다. 우리는 내가 일찍이 마련해 둔 [[묘지]]에 그 순교자들의 시신을 묻었다. 나는 유럽식으로 그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값비싼 [[향수]]를 뿌리고 [[성유]]를 발라주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했고 그런 식으로 시신들을 입히는 것은 신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겨우 멍석으로 감쌌다. 지금 우리는 [[천국]]에 많은 보호자를 모셨다. 나는 [[조선]]에 종교의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그 날이 오면, 이 시신들은 귀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
 
성 김업이 막달레나와 성 김아기 아가타 그리고 성 한아기 바르바라는 [[1925년]] [[7월 5일]]에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