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 (1551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7,413 바이트 추가됨 ,  6년 전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배설'''(裵楔, [[1551년]] ~ [[1599년]])은 [[조선]]의 무관이다.  당대에 삼남의 백성들의 우상이였고, 의병들의 질투의 대상이였든 것은 분명하고 왕조를 위협할 역모의 0순위 위험인물로 영의정겸 비서실장 유성룡이 스스로 징비록을 집필해서 배설을 도망자로 전국민에게 알려야 할 만큼 급박했었다.
'''배설'''(裵楔, [[1551년]] ~ [[1599년]])은 [[조선]]의 무관이다.
 
 
김면과의 부상진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됩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김면이 죽은 후 한참 있다가 합천군수가 된다. 
 
 
 즉,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배설이 부친인 의병장을 따라가서 2만여 왜군의 적장의  목을 의병 신분으로 베었다.  물론 이전투에서 의병들은 패했지만, 적장이 살해 되므로서  왜군들이 남으로 퇴각하여  조선 의병군은 패전후 얼마  후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전투의 무공을 인정받아 직접 선조임금의 부름을 받아공으로 합펀군수가 된다.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습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 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3, 배설은 김면이 죽은후 합천군수가 되었다.(배설이 김면에게 곤장을 맞았다는것도 사실이 아니다.)
 
 
성주성 전투(1592) 7월에 무계의 일본군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한 의병장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면 등과 성주성을 탈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성주성은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였다.
 
거기다가 곽재우와 김면 의병군에게 쫓긴 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정인홍과 김면은 8월 21일을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가쓰라는 조선군의 병력이 수만 명에 달하자 개령에 있던 본진의 모리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일본증원군은 곧장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면서, 조직적인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해야 했다.  이로써 성주성 공격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 보고 실패로 돌아갔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정인홍, 김면 의병군은 한달쯤 뒤이9월 11일 다시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이번에는 합천 군수 배설과 합천 가장(임시직) 김준민을 설득하여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군에 가담시킬 수 있었다.  성주성 5리 밖 가평에 지휘본부를 설치한 의병군은 10일 하루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은 성을 굳게 지킬 뿐 반격하지 않아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는 한편 1차 공격 실패의 교훈을 본받아 김면은 개령으로부터 오는 일본지원군을 차단하기 위해 합천 군수 배설로 하여금 개령과 성주 사이에 부상현 일대에 병력을 매복하여 일본증원군을 차단하도록 지시했는데, 배설은 "내가 어찌 일개 서생의 명령에 따라야 하느냐"며 김면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작전 지역을 이탈해 버렸다.
 
11일 아침부터 공성기구인 우네와 충차등을 준비하는 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군의 증원이 의병군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추어 성 안의 일본군도 성을 나와 협공하였다. 배설은 일찍이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후,  관직이 아니라 아버지인 의병장을 따라 이 전투에 참여 하였습니다. 이 전투에 적장의 목을 베어 2년 후에 합천 군수로 부임하게 되므로 이전투에서 가장 공을 많이 세워 출세한 배설에 대한 시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혼전 중에 정인홍으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또다시 패주하며 2차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3차 공격은 석달 뒤인 12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12월 7일 성주성에 도착한 경상, 전라 의병 연합군은 8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피해가 너무 심해져 결국 14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성을 지켜낸 일본군은 그러나 이듬해인 1593년 전세가 점차 불리해져 본대가 후퇴해야할 상황에 이르자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다.
 
 
 
김면과 배설이 전투에 함께했든 것은 맞으나, 김면은 의병장이고 배설은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여한 의병이였습니다.  아마 이전투로 배설은 출세하게 됨에 따라 의병들의 시기와 질투가 와전 된 것이 분명하다.  특히 김면이 죽고 난 다음 해에 배설이 합천 군수로 부임하게 됨으로 위의 어록은 배설이 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의병인 배설이 저래 말 할 수 없을 뿐더러, 김면이 죽고난 다음 합천군수가 되었으며, 배설이 합천군수가 되기 전에 김면은 의병장을 하면서 천석지기의 논밭을 다읽고  가족들이 뿔 뿔이 흩으진 상황에서 사망한다. 따라서 배설의 어록은 징비록의 유성룡이 지어낸 것이고 이를 고대일기 난중잡록이 전재한 것임을 알수 있다.
 
 
 
 
 
== 주요 생애 ==

편집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