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신덕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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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신덕왕후 강씨는 [[1356년]]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이성계에게 버들잎을 띄워 물을 준 버들잎 설화의 주인공으로, [[1392년]] 조선(朝鮮)의 개국으로 강씨는 음력 [[8월 7일]] 조선의 첫 왕비(王妃)가 되어 현비(顯妃)에 봉해졌다. 그러나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아들인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도록 애썻으며 이와 관련해서 [[이방원]] 등 [[신의왕후]]의 장성한 아들들과의 후계 다툼으로 알력이 있었다. 결국[[정도전]]과 합세하여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 뒤 신덕왕후는 [[1396년]] 음력 [[8월 13일]] 세상을 떠나고,떠났다. 2년 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의안대군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제거되었으며, 사위인 이제까지 살해당하였다.<ref>[[신덕왕후]]</ref> 이성계는 강씨 사망 후 실의에 빠져서 직접 능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행차를 아침저녁으로 바쳤으며 1397년 1년여의 공사 끝에 170여 간 규모의 [[흥천사]]를 세웠다고 한다.
 
태종은하지만 이후 태종(이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태조가 애지중지하던 정릉을 태조의 사망(1408년 음력 5월 24일)후에는 파괴하고 이전했다. 태종 9년 [[1409년]] 정릉은 서울 정동지역에서 도성 밖 양주, 현재의 [[서울시]] [[성북구]]로 옮겨졌다. 태종은 더욱이 정동에 있던 정릉의 원래 자리의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없애도록 명했으며, [[1410년]] [[청계천#광통교|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ref>{{웹 인용
|url =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0331003766&subctg1=&subctg2=
|제목 = 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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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Jeongneung fullview.jpg|아래에서 올려다본 봉분과 정자각
</gallery>
 
== 같이 보기 ==
* [[조선의 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