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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는 만 16세가 되던 [[1971년]]에 정규 1집 음반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데뷔해 정식 가수가 되었다. 1집 음반의 타이틀곡이였던 〈물새 한마리〉가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 인기몰이를 하게 되고 성인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가요계를 이끌게 되었다. [[1972년]]에 작곡가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 TBC 동양방송에서 여자가수상을 4년 연속으로 수상하며 불과 만 17세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TOP 가수로 성장했다. 그 해 자신의 고향을 소재로 만들어 아리랑의 맥을 이어나간〈영암 아리랑〉이라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 가수였던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했다.
 
공식 데뷔 이후 한창 상승세를 타던 하춘화는 [[1974년]]부터 자신만의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하였으며 [[1975년]]에 빠른 템포의 트로트〈난생 처음〉을 히트시켜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하고 최고의 경지까지 올라갔으나 [[1977년]] [[11월 11일]], 전라북도 이리시 (현 [[익산시]]) 이리역에서 공연 도중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열차가 폭발하여 약 59명이 사망, 1158명이 부상을 당하였고 그 중에 하춘화와 [[이주일]]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가수로서의 활동에 지장을 주기도 했다.([[이리역 폭발사고]]) 또한 [[1979년]] [[3월 27일]], 하춘화는 [[경남대학교]]에서 학업준비와 동시에 결혼준비로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학업에 열중하던 하춘화는 은퇴선언 2년 만인 [[1981년]]에 가수로 복직하였으며 가수로 활동하면서도 학업에 대한 열정이 많았다고 한다. 가수로 복직한 뒤에는 서정적인 분위기의 노래〈우리 사랑 가슴으로〉,〈연인의 부르스〉가 히트하였고 [[1983년]]에 자신의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대중들로 부터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가수였던 하춘화는 [[1985년]]에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시 남측 여자가수 대표로 3박 4일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에서 공연하기도 했다.